과학산책
얼어붙은 세계의 역동성
태양계 하면 우린 태양과 여덟개의 행성, 그리고 행성의 지위에서 쫓겨난 명왕성을 떠올리곤 한다. 조금 더 생각하면 화성과 목성 사이에서 확인된 100만개가 넘는 소행성과 해왕성 너머 카이퍼벨트나 태양계를 감싸는 오르트구름으로 시야가 확장된다.
이들 중 해왕성 바깥 천체(Trans-Neptunian Objects, TNOs)로 불리는 먼 거리의 천체들은 태양계 형성 초기의 물질 정보를 그대로 포함하는 태양계의 화석으로 간주되어 왔다. TNO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명왕성도 있지만 이와 크기가 비슷한 에리스를 비롯해 여러 왜소행성들도 포함된다.
최근 일본의 천문학계가 발표한 한 연구는 얼어붙은 세상으로 여겨진 TNO에 존재하는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약 500km의 지름에 명왕성과 비슷한 궤도를 도는 2002XV₉₃이란 소천체에 대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 정도의 천체는 중력이 작아 대기를 안정적으로 붙들기 힘들다. 그래서 그간 명왕성을 제외한 TNO들에선 대기가 확인된 적이 없다. 추정된 2002XV₉₃의 표면 기압은 지구 표면의 기압보다 약 10만배나 낮은 명왕성의 기압에 비해서도 100배나 더 낮아서 극도로 희박하다.
멀리 떨어진 소천체에서 대기 발견
이처럼 작고 멀리 떨어져 있는 소천체의 대기를 직접 검출하기는 매우 어렵다. 연구자들은 이 천체가 먼 항성 앞을 지나가며 별을 가리는 ‘성식(星蝕, stellar occultation)’을 이용해 대기의 존재 여부를 확인했다. 성식이란 달이 지구와 태양 사이를 지나며 태양을 가리는 일식과 비슷한 현상이다.
대기가 없다면 소천체가 항성을 가리며 성식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별빛의 세기가 급격히 줄어들다가 늘어난다. 강한 여름날 운동장에 내리쬐는 직사광선으로 생긴 철봉의 그림자가 만드는 두 경계선이 뚜렷한 것처럼 말이다.
연구진은 2024년 1월, 2002XV₉₃가 일으키는 성식의 궤적을 따라 일본 내 서로 다른 세 곳에서 별빛의 밝기 변화를 추적했다. 세 대의 망원경으로 추적한 별빛의 밝기 변화는 급격한 대신 매우 완만한 모습이었다. 이런 점진적인 변화는 별빛을 가리는 소천체의 형상만으론 설명될 수 없었다. 소천체의 표면에 존재하는 무엇인가가 통과하는 별빛을 변조시키고 있었다. 바로 2002XV₉₃의 대기였다.
천체의 대기는 보통 고도에 따라 밀도가 달라진다. 지구의 대기도 마찬가지다. 표면에 가까울수록 대기의 밀도가 올라간다. 공기 밀도가 높아지면 빛을 휘는 성질을 표현하는 굴절률도 따라서 증가한다. 먼 항성에서 출발해 2002XV₉₃의 대기를 통과하는 빛은 굴절률이 높은 표면 쪽으로 살짝 휘어진다. 그 작은 변화가 지구로 오면서 증폭되어 별빛의 세기를 급격히 줄이기보다는 완만한 변화를 유도한다.
지구의 대기에 의한 태양빛의 굴절도 흥미로운 현상을 만들곤 한다. 지구의 그림자 속에 달이 숨는 개기월식 때 달이 사라지기보다 희미하게 보이거나 석양에 수평선 아래로 숨은 태양이 빛의 굴절로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 등이 일부 예다.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 춥고 작은 천체에 대기가 있다는 사실은 과학자들의 큰 흥미를 끌고 있다. 일반적인 조건에서 이런 소천체가 대기를 유지하긴 힘들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추정하는 원인은 둘이다. 하나는 최근 다른 소천체가 2002XV₉₃에 충돌하며 휘발성 물질이 분출되어 대기를 만들고 이것이 수십 년 동안 잔존한다는 견해다. 이 경우 100년쯤 지나 대기가 사라지면 항성식의 패턴이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다른 한 가지 가능성은 소천체 내부에 물-암모니아-메탄 등이 섞여 용융점이 낮아진 혼합물이 내부 열원(방사성 동위원소의 붕괴가 한 원인일 수 있다)으로 인해 얼음 슬러시 형태로 존재하다 표면으로 분출되는 것이다. 이를 얼음 화산 활동(cryovolcanism)이라 부른다.
시민 과학의 활약을 기대한다
성식으로 만들어지는 소천체의 그림자는 지구의 좁은 지역을 따라 형성되기 때문에,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관측을 시도해야 신뢰성 있는 데이터가 얻어진다.
이번 연구 논문의 공동저자에는 후쿠시마의 시민 천문가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망원경으로 2002XV₉₃의 밝기 변화를 정밀히 측정하며 해당 연구에 실질적이고 중요한 기여를 했다. 꽁꽁 언 세계라 생각했던 카이퍼벨트의 천체들이 생각보다 훨씬 역동적인 무대임을 밝힌 본 연구는 전문가와 시민 과학의 멋진 결합으로 탄생한 셈이다.
시민 과학이 이미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는 외계행성 탐색이나 빛공해 모니터링 분야처럼 시민 과학의 활약이 더욱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길 기대해 본다.
한림대학교 교수
반도체·디스플레이스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