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

우유 한 팩에 던지는 질문

2026-06-09 13:00:01 게재

냉장고 골든존을 차지하는 1리터 종이팩은 집안의 영양을 수호하는 자리다.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 단지를 모시듯 우유가 없는 냉장고는 곧 부정을 탈 것 같았다. “우유가 떨어졌으니 사오라”는 어머니의 말씀은 터줏가리에 정화수를 올리던 간절함과 다르지 않았다. 믿음이 흔들릴라치면, 병원 식판 위의 앙증맞은 종이팩이 그 의심을 조용히 눌렀다. 온몸이 성한 데 없는 환자에게도 빠지지 않는 것이 우유였다.

의심은 믿음이 부족한 탓이었다. 키가 크고 뼈가 단단해지기를 바라는 소망 앞에서, 학교 급식 식판 위의 우유는 늘 정답처럼 자리했다. 배가 더부룩해도 설사를 하더라도 마셔야 했다. 이 견고한 관성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우유 한 팩 안에는 식품가공 기술의 핵심공정들이 압축되어 있다. 집유된 생유는 공장에 도착하자마자 ‘표준화’를 거친다. 젖소의 상태나 계절, 사료에 따라 원유의 지방과 단백질 함량이 매번 달라지기 때문에 최종 제품의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하도록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과정이다.

이후 ‘균질화(Homogenization)’ 공정을 통해 원유를 고압으로 좁은 틈새에 통과시키면 지방구가 미세한 입자로 부서지고, 단백질이 표면을 둘러싸며 안정 상태를 만든다. 본래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지만 균질화를 거친 우유 속 지방은 고르게 분산되어 떠오르거나 가라앉지 않는다. 우리 혀가 느끼는 우유의 부드러운 감촉은 사실 기계가 완성해 낸 인공의 질감인 셈이다.

초고온 순간처리법(UHT)은 130~150℃에서 단 2~5초간 가열해 병원성 미생물을 사멸시킨다. 영양소와 풍미 손실은 최소화하면서 안전성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상온에서 수개월 보관 가능한 멸균 우유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식품 가공공학의 살아 있는 집합체

우유 한 팩에는 표준화, 에멀젼화, 유체역학, 미생물 제어, 열처리 기술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작동한다. 버터 치즈 요구르트까지 시선을 넓히면 우유는 그 자체로 식품가공 공학의 살아있는 집합체다.

그런데 19세기 산업혁명기 대도시에서 우유는 오히려 위험한 식품에 가까웠다. 냉장시설도 살균기술도 없던 시절 우유는 쉽게 상했고, 결핵균과 살모넬라 같은 병원균의 전파 매개체가 되기도 했다. 특히 면역이 약한 영유아와 어린이들이 상한 우유로 목숨을 잃는 일이 빈번했다. 루이 파스퇴르가 개발한 저온살균법은 우유를 비로소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음료로 바꾸어 놓은 분수령이었다.

냉장 유통망이 촘촘하게 갖춰지면서 우유는 식탁의 안전한 주역으로 거듭났다. 1970년대 낙농업 육성 정책과 학교급식이 우유 소비를 일상에 깊이 심었다. 전쟁 직후 분유는 진짜 굶주린 아이들을 먹이기 위한 것이었다. 다만 그 선의는 동시에 미국 낙농업의 과잉 재고를 해소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인도주의와 잉여농산물 처리가 같은 배에 타고 있었던 셈이다.

결국 1981년 학교우유급식사업이 전국 초등학교로 확대됐다. 그런데 이 사업의 법적 근거가 낙농진흥법과 축산법이다. 주관 부처도 교육부가 아니다. 농림축산식품부다.

우유는 양질의 단백질과 칼슘을 공급하며, 심혈관이나 대사 건강과 관련한 긍정적인 연구 결과도 꾸준히 나온다. 다만 동아시아 인구 대다수가 겪는 유당불내증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성인이 되면서 유당분해효소인 락타아제의 활성이 자연스럽게 낮아지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 경향이다. 오히려 성인이 되어서도 유당을 잘 소화하는 집단이 유전학적으로는 예외적인 경우다.

우유만이 유일무이한 칼슘 공급원처럼 여겨져 온 배경에는 이처럼 영양학적 근거만큼이나 우유를 대량소비시켜야 했던 근대 산업사회의 경제적·산업적 흐름이 강하게 작용했다.

우유가 반드시 정답은 아니다

물론 우유 자체를 부정적으로만 볼 이유는 없다. 다만 우유가 지나치게 유일한 ‘정답’처럼 받아들여져 온 측면은 있다. 최근 하버드 의과대학이 ‘상업적 압력에 영향받지 않은’ 독립지침을 따로 만들어 우유를 필수식품 목록에서 뺀 것은 그 방증이다. 우유가 완전식품의 자리를 차지하는 동안 우리 몸에 오랫동안 맞춰져 온 이 전통식품들은 조용히 뒷전에 머물렀다.

우유 그 안에는 전후 미국의 원조, 산업정책, 냉장 유통 기술, 서구 영양학의 수용, 그리고 근대화 과정 속에서 형성된 생활습관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우유는 식품과학적으로는 대단히 흥미로운 식품이다. 그리고 식품사적으로는 꽤 많은 질문을 남기는 식품이기도 하다.

김기명 푸도슨트식품연구소 연구소장 식품공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