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쿠바 한인 후손을 잊지 말자

2026-06-09 13:00:01 게재

미국의 대외 군사행동이 중동을 넘어 확산될 가능성이 거론되는 가운데 쿠바가 다시 국제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가정에 불과하다고 넘기기엔 국제정치는 언제나 예상을 앞질러 움직여왔다. 만약 쿠바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이 현실화된다면 그 충격은 지정학을 넘어 현지 주민들의 삶에 직접적인 타격으로 이어질 것이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대쿠바 강경 조치가 정치 일정과 맞물린 ‘선거용 변수’일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그 여부와 무관하게 현장의 고통은 이미 현재진행형이다.

지금 쿠바는 전쟁이 아니어도 전쟁과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 베네수엘라발 원유 공급이 끊기면서 전력난은 일상이 되었고생필품 부족과 물가 급등은 시민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수도 아바나에서는 차량 운행이 줄고 쓰레기 수거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보도가 이어진다. 연료 부족이 도시 기능 자체를 흔들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멕시코 대사 재임 시 쿠바를 겸임하며 여러 차례 현지를 방문했다. 특히 2021년 대규모 반정부 시위 이후 사회가 변화의 갈림길에 서 있던 시기를 직접 목격했다. 당시에도 식량 배급 축소, 잦은 정전, 끝이 보이지 않는 주유 대기 행렬이 일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특별한 시기’라 불렸던 경제적 고난보다 더 힘든 시기가 재현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쿠바 경제난의 원인은 장기간의 대외 제재와 내부 정책 실패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어느 한쪽으로만 돌릴 수 없는 구조적 문제다.

대 쿠바 강경조치로 군사적 긴장감 높아져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존재가 있다. 바로 쿠바에 거주하는 약 1000명의 한인 후손들이다. 이들은 1921년 멕시코 유카탄에서 다시 쿠바로 건너간 한인 이주민들의 후예로, 5~6세대에 걸쳐 정착해왔다. 낯선 땅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면서도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자금을 모아 조국에 보냈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들의 삶은 단순한 이민사의 한 장면이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코로나 시기 필자가 긴급 생필품을 들고 이들을 찾았을 때, 그들은 “대한민국이 우리를 잊지 않았다”는 사실에 눈시울을 붉혔다. 10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역사적 연대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외교가 국가 간 이해관계를 넘어 사람과 사람을 잇는 책임이라는 점을 다시 일깨워주는 순간이었다.

2024년 한국과 쿠바는 수교 76년 만에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러나 제재 구조 속에서 경제협력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더욱 필요한 것은 사람 중심의 접근이다. 지금이야말로 정부가 쿠바 주재 국제기구와 협력해 긴급 인도적 지원을 추진할 시점이다. 식량과 의약품, 기본 생필품 등 삶을 지탱하는 최소한의 지원부터 시작할 수 있다. 특히 한인 후손 사회에 대한 맞춤형 지원은 역사적 책임이자 미래를 향한 투자다. 정부 차원뿐 아니라 민간 차원의 참여도 중요하다. 장학사업과 교육 교류를 통해 이들이 한국과 연결될 수 있는 통로를 넓혀야 한다.

쿠바의 한인 후손 인도주의적 지원 시급

외교는 거대한 담론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국제정치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의 존엄과 기억이다. 쿠바 한인 후손들은 과거의 존재가 아니라 지금도 우리와 이어진 현재의 공동체다. 전쟁의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선택은 더욱 분명해진다. 잊지 않는 것, 그리고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도 책임 있는 외교다

서정인 유엔기념공원관리처장 전 멕시코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