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구청장선거 1위, 민주·국힘 아닌 ‘기권표’
구청장 당선인 72%, 기권표보다 못 얻어
투표층만 봐선 안돼 … ‘기권표심’ 주목해야
6.3 지방선거 서울 구청장 선거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곳은 어디일까. 여당인 민주당도, 제1야당인 국민의힘도 아닌 바로 ‘기권표’다.
11일 내일신문이 서울 25개 자치구 구청장 선거를 분석한 결과 당선인이 얻은 득표수가 해당 지역 기권자 수를 넘어선 곳은 단 7곳에 불과했다. 나머지 18개 자치구에서는 1위로 당선된 후보조차 투표장에 나오지 않은 유권자 수보다 적은 표를 얻었다.
성동·성북·노원·양천·서초·강남·송파구 당선인만 기권표보다 많이 득표했다. 그마저도 전통적으로 특정 정당 지지세가 강하거나 표가 한쪽으로 집중되는 지역이 대부분이었다. 서울 구청장 당선인의 72%가 기권표보다 적은 득표로 당선된 셈이다.
기권 규모는 적지 않았다. 송파구 기권자 수는 19만3166명으로 당선인 득표(20만1265명)에 근접했고, 강동구는 기권자 수가 14만7910명에 달해 당선인 득표(14만6737명)를 넘어섰다. 관악구는 18만5635명, 강서구는 18만6816명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3명 이상 후보가 출마해 표 분산을 감안해야 한다는 반론도 있다. 하지만 이들 지역에서도 군소후보 득표 수를 1위 후보와 합산해도 기권표 수를 넘지 못했다. 단순히 선거공학적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이를 유권자의 무관심으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최근 보고서에서 시민 참여 감소와 낮은 투표율이 민주주의 정당성에 대한 우려를 키우고 있다고 진단했다. 아울러 시민들의 정치 효능감과 참여 의식이 약화될 경우 민주주의 체계에 결함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선거 대표성, 민주주의 정당성 훼손=
최근 해외 정치학계에서도 기권을 단순한 무관심이 아닌 정치적 신호로 해석하는 연구가 늘고 있다. 지난해 한 유럽 연구기관이 발표한 보고서는 “기권은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의 인식과 정치체제에 대한 참여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분석했다.
무효표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과거에는 실수로 인해 발생한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의도적 백지투표나 무효 처리 방식으로 불만을 표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정치학에서는 백지·무효투표를 ‘항의 투표(protest vote)’의 한 형태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정치권은 기권층을 외면하고 고정 지지층 관리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 진단이다. 이 같은 전략이 반복되면 정당은 점점 강성 지지층만 바라보게 되고, 정치적 양극화와 팬덤 정치가 심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투표에 참여하는 소수의 목소리만 커지고 다수 시민은 정치 과정에서 더욱 소외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것이다. OECD 역시 정치 양극화와 전통 정치과정 이탈 현상을 민주주의가 직면한 주요 위협으로 지목하고 있다.
중앙정치 바람이 약화된 것은 긍정적 변화로 평가된다. 한때 서울 구청장 선거는 여야가 25대 0, 24대 1로 극단적 쏠림 현상이 반복됐다. 최근 두 차례 선거는 대통령 선거와 시간차가 얼마 되지 않는데도 17대 8 구도를 형성하며 일정 수준 균형을 유지했다.
그러나 투표 참여 확대라는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특히 이번 지방선거 과정에서 일부 지역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하면서 참정권 보장 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정치권이 기권층의 목소리를 계속 외면할 경우 정치 불신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는 “기권은 침묵이 아니라 정치권에 보내는 경고”라며 “정당이 지지층만 바라보고 기권층을 방치하면 대표성 위기가 심화되고 민주주의의 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선거의 승패보다 중요한 것은 왜 많은 시민이 투표장을 떠나는지 살피는 일”이라며 “기권표를 잃어버린 민심으로 취급하지 말고 회복해야 할 민심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제형 기자 brother@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