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감원 상장사 감리주기 20년…회계부정 키우는 감독 악순환
감리인력 60명으로 상장사 2538곳 감독…적발 확률 낮아져 억지력 약화
코스피 10년·코스닥 5년 목표 … 학계 ‘150명 필요, 90명 인력 증원’ 제안
미국 3년, 영국 5년 등 감리주기 격차 … 계좌추적권·AI 감리 도입도 제시
상장기업에 대한 금융당국의 회계감리 체계가 인력 부족과 조사권 한계, 시장 퇴출 지연이 맞물리면서 회계부정 억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현재 상장기업에 대한 금융당국의 평균 심사·감리 주기가 약 20년에 달해 상당수 기업은 경영진 재임 기간 중 단 한 차례도 정식 감리를 받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기업들이 적발 가능성을 체감하기 어려워 회계부정 억제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반면 미국과 영국, 일본은 정기 심사와 강력한 조사권, 디지털 감독 체계를 기반으로 회계부정을 적시에 적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감독원은 24일 서울 여의도 본원에서 한국회계학회와 공동으로 ‘회계 심사·감리제도 개선방향에 관한 연구 세미나’를 개최했다. 세미나에서는 박경진 명지대 교수와 오명전 숙명여대 교수가 연구한 ‘회계감리 체계의 실효성 진단과 개선방안’이 발표됐다.
연구진은 기업에 대한 금융당국의 감리 주기가 길어질수록 회계부정 억제력 약화와 투자자 피해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금융당국의 감리 인력 부족이 감리 주기 장기화에 따른 회계부정 적발 확률 하락으로 이어지고, 제한적인 조사권 탓에 개별 감리마저 장기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회계부정 적발 이후 상장폐지 등 시장 퇴출 절차도 지연되면서 감독의 실효성이 떨어지고, 결과적으로 회계부정 유인을 키우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1인당 상장사 79개 모니터링 = 현재 금감원 회계감리 조직은 정원 기준 60명, 실제 현장 전담 인력은 32명 수준이다. 이들이 감독하는 상장사는 코스피·코스닥 합산 2538개사에 달한다. 연간 처리 건수는 127개사에 불과해 현재 심사·감리 주기는 평균 20년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됐다.
연구진은 “상장사수는 2500개를 상회하나 기업심사·감리 정원은 60명에 머물러 감독수요와 투입자원 간 괴리가 심각하다”며 “현장 전담 인력 32명 기준으로는 1인당 약 79개사를 사실상 상시 모니터링해야 해서 심층 검토가 구조적으로 어렵다”고 밝혔다.
해외 주요국은 보다 촘촘한 감독 체계를 운영하고 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회계 심사·감리 전담 인력 약 430명이 5500~6000개 상장사를 감독한다. 특히 사베인스-옥슬리법(SOX) 408조에 따라 모든 상장사를 최소 3년에 한 번 이상 정기 심사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단순히 인력이 많은 데 그치지 않고 기업재무국이 정기 심사를 담당하고 조사국이 강제조사를 수행하는 분업 체계를 갖추고 있다.
영국은 회계심사와 강제 집행을 분리한 이원 체계를 운영한다. 회계감독기구인 FRC가 재무보고와 감사 품질을 상시 점검하고, 고의적 회계부정 정황이 포착되면 금융감독기구인 FCA가 강제 조사에 나선다. FTSE350 기업은 최소 5년 내 한 번 전면 심사를 받는다.
연구진은 국내도 코스피 상장사에 대해 10년, 코스닥 상장사는 5년 내 최소 1회 심사 체계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연간 약 450개사를 처리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현장 전담 인력 98명, 지원 인력 52명 등 총 150명 규모의 조직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현재보다 90명을 추가 증원해야 한다는 계산이다.
연구진은 기업 재무제표 감리뿐 아니라 외부감사인(회계법인) 감리 체계도 함께 확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국내 감사인 감리국의 실질 감리 인력은 15명 수준으로 39개 회계법인을 감독하고 있다. 회계법인 1인당 담당 수는 한국이 2.6개로 미국 PCAOB(1.0개), 영국 FRC(0.1개)보다 훨씬 많은 수준이다. 연구진은 감사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기업 감리뿐 아니라 회계법인 감독 역량 강화도 병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주요국과 비교해 조사권도 제한적 = 이와함께 해외 주요국과 비교할 때 국내 회계감리의 조사권이 지나치게 제한적이라는 분석도 제시됐다.
미국과 영국, 일본은 금융거래 정보 조회권과 제3자 정보요구권을 활용해 자금 흐름을 직접 확인하는 반면 국내는 기업의 자발적 자료 제출에 의존하는 임의조사 체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미국 SEC는 엔론과 월드컴 사건 조사 과정에서 금융기관 자료를 활용했고, 영국 FCA는 테스코 회계부정 사건에서 공급업체 계좌 추적을 통해 이면계약을 적발한 바 있다. 일본 SESC 역시 도시바 분식회계 사건에서 프로젝트별 자금 흐름을 추적해 회계조작을 밝혀냈다.
이에 따라 국내도 금융실명법 개정을 통해 회계감리 단계에서 계좌추적권을 부여하는 등 조사권을 보완해야 한다는 게 연구진의 주장이다. 가공거래나 가장납입, 허위채권 회수 등 회계부정의 상당수가 자금 흐름 추적을 통해 드러나는 만큼 현행 임의조사 체계만으로는 대응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감리 체계 고도화 필요성도 강조했다. 현재는 재무제표와 공시자료를 중심으로 심사·감리가 이뤄지고 있지만 앞으로는 XBRL 재무정보와 공시, 주가, 금융거래 데이터를 통합 분석하는 AI 기반 감리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 증권거래감시위원회(SESC)처럼 AI를 활용해 고위험 기업을 선별하고 자금 흐름 분석과 연계할 경우 제한된 인력으로도 감독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회계부정 기업 퇴출 지연, 포괄적 재량권 주목 = 회계부정 기업에 대한 시장 퇴출 절차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현재 국내는 증권선물위원회 의결 이후 거래정지, 기업심사위원회, 개선기간 부여, 이의신청 등의 절차를 거치면서 상장폐지 여부가 결정되기까지 평균 1년 6개월 이상 소요된다. 반면 미국 뉴욕증권거래소는 중대한 회계부정이 확인될 경우 포괄적 재량권을 활용해 신속하게 퇴출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상장폐지는 자본잠식, 시가총액 미달, 감사의견 거절 등 정해진 요건을 충족해야 가능하지만, 포괄적 재량권은 중대한 회계부정이나 투자자 보호 문제가 발생했을 때 거래소가 정량 요건 충족 여부와 관계없이 상장적격성을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을 말한다.
회계처리기준 위반으로 증권선물위원회의 제재를 받은 상장사들이 실제 상장폐지로 이어진 사례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최근 10년간 회계부정으로 상장폐지된 기업은 20곳에 불과했고, 이 가운데 중대한 회계위반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확인된 사례는 6곳에 그쳤다. 회계감리 결과가 시장 퇴출로 이어지지 못하면서 회계부정에 대한 경고 효과와 시장 규율 기능이 약화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찬진 금감원장은 “2017년 회계개혁 이후 감사품질 등에 의미 있는 발전이 있었으나, 반복되는 회계부정 사건이 시장 신뢰를 훼손하는 구조적 위협이 되고 있다”며 “회계부정을 조기에 식별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예방적 감독체계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금감원은 이번 연구 결과와 현장 의견을 바탕으로 회계 심사·감리제도 개선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금융위원회와 협의해 마련하기로 했다.
이경기 기자 cellin@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