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호르무즈 청구서, 아·태 해협으로 번질 수 있다
얼마 전 인도네시아 재무장관은 말라카 해협을 3개 연안국별로 구분해 통행료를 징수하자고 했다가 다른 연안국인 싱가포르·말레이시아의 반발과 자국 내 비판으로 물러선 일이 있다. 호르무즈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아·태 해협으로 번질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판도라의 상자가 한번 열리면 전세계적 연쇄반응을 배제할 수 없고 국제 해운에 크게 의존하는 아·태지역은 훨씬 더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호르무즈 해협의 선박 통행은 재개됐지만 불확실성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미-이란 종전 양해각서(MOU) 제5조는 서명 후 60일간 무료 통항만 보장하고, 그 이후 관리방식은 이란이 오만과 협의해 정하도록 비워뒀다.
그 사이 이란은 페르시아만해협청(PGSA)을 세워 항행·환경·보험 명목의 ‘서비스 요금’ 부과를 준비 중이고 일각에서는 그 규모가 연간 60조원에 이를 것이라는 추산도 나온다. 공동 관리의 한 축인 오만은 최근 자발적인 서비스료 징수는 가능하다는 입장으로 선회했으며 미국은 “국제수로에 통행료나 수수료를 부과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고 맞서고 있다.
이란은 수에즈·파나마 운하의 통항료나 튀르키예 보스포러스·다르다넬스 해협의 관리비 징수와 다를 바 없다는 논리도 내세운다. 그러나 수에즈·파나마 운하는 영토 주권 아래 건설된 인공수로로 통행료도 별도의 국제조약에 근거한다. 튀르키예 해협의 관리비 역시 자국을 관통하는 수로의 안전관리를 위한 국제조약에 근거하고 있어 이란측 주장과는 결이 다르다.
오만이 제시하는 말라카·싱가포르 해협의 관리 기부금 사례는 등대 부표 레이더반사기 등의 유지 보수를 위한 순수 자발적 기여금으로 해양법 협약상에 근거하며 누적액도 적고 미기여 선박의 통항도 보장된다. 이 때문에 도밍게스 국제해사기구(IMO) 사무총장은 근거 없는 비용 추징이 다른 핵심 수로에 위험한 선례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근거 없는 통항료, 핵심 수로의 위험한 선례
국제 항행에 사용되는 해협문제는 1982년 타결된 유엔 해양법 협약 협상에서 가장 어려운 난제의 하나였다. 3해리에서 12해리로 확장된 영해에 대한 연안국의 주권 행사와 그동안 해협을 자유롭게 이용해 온 주요 해양국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했기 때문이다.
결국 협약은 ‘국제 항행에 사용되는 해협’이라는 별도의 장(제3장)을 두어 해협과 그 상공에서 선박·잠수함·항공기가 방해받지 않고 신속히 통행할 수 있는 ‘통과통항권(Transit Passage)’ 제도를 도입했다. 호르무즈 해협 등 새롭게 연안국 영해에 포함된 전세계 116개 해협이 이 제도의 적용 대상이 됐다. 이란은 이 협약을 비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1949년 국제사법재판소가 코르푸해협 사건에서 확인했듯 국제 항행에 이용되는 해협의 통항 자유는 국제 관습법으로도 인정돼 왔다.
호르무즈에 통항료가 부과되면 우리가 크게 의존하는 아·태지역 해협도 직간접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호르무즈가 에너지 통로라면 아·태지역 해협은 에너지뿐 아니라 국제교역과 첨단 반도체·배터리 공급망의 종합 통로다.
말라카 해협은 가장 좁은 곳의 폭이 1.5해리에 불과하지만 연간 10만척 이상의 선박이 지나며 국제교역의 40%, 한국 수출입의 30%, 중국 원유 수입의 80%가 통과하는 길목이다. 앞서 본 인도네시아의 시도처럼 호르무즈의 해양질서가 근본적으로 바뀐다면 이들 연안국의 입장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브루킹스연구소의 린 쿽 석좌연구위원은 상황이 더 악화되면 미국이 중국 원유의 주공급선인 말라카 해협을, 중국이 대만 해협을, 미국과 필리핀이 루손 해협을 각각 통제하려는 시나리오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그는 인도네시아가 말라카를 우회하는 자국의 순다·롬복 해협에 통행료를 물릴 가능성도 지적한다.
호주는 파푸아뉴기니와의 사이에 있는 토레스 해협에서 선박 좌초와 생태계 훼손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자국 도선사 의무 승선을 요구해 국제사회의 큰 반발을 사고 있다. 이를 사실상의 통항료로 보고 따르지 않는 선박도 있지만 호르무즈 상황에 따라 더 엄격한 관리 체제가 도입될 수도 있다.
호르무즈, 국가 생존과 직결된 구조적 리스크
국제법은 해협이 연안국의 전유물이 아니라 국제사회 전체의 공공재임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현실은 군사력과 지정학 논리에 자주 흔들려 왔다. 한국은 호르무즈를 중동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생존과 직결된 구조적 리스크로 받아들여야 한다.
항행의 자유 원칙을 일관되게 지지하고 에너지 수입선을 다변화하며 유사 입장국과 함께 다자주의에 입각한 목소리를 강력히 낼 필요가 있다. 호르무즈의 청구서를 막을 수 없다면 다음 청구서는 바로 우리 곁에서 날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