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AI 병목 쥔 반도체, 자리 쥔 정치
세계 인공지능(AI) 산업의 병목을 쥔 한국 반도체 앞에서는 글로벌 기업도 대통령도 고개를 숙인다. 그러나 정작 정치권은 국민 삶의 병목을 풀기는커녕 총선 공천권을 둘러싼 자리싸움에 빠져 스스로를 ‘없어도 되는 존재’로 만들고 있다. AI 시대의 필수 인프라가 된 반도체처럼 정치도 국민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거듭나지 못하면 여야는 함께 공멸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지난 6월 방한한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공급망 조율을 위한 목적”이라고 했다. 차세대 그래픽처리장치(GPU)에 올릴 고대역폭메모리(HBM)를 확보하려고 그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를 찾았다. 그로부터 3주 뒤 청와대 영빈관에서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대통령 옆에 나란히 앉았다. 이재명 대통령은 두 총수에게 90도로 인사를 하며 1000조원대 투자와 클러스터 조성에 공을 들였다. 세계 최고 AI 기업의 수장도, 한 나라의 대통령도 반도체 앞에서 몸을 낮추는 장면이다.
국민 병목엔 뒷전, 외면받는 정치권
왜 이런 장면이 벌어지나. 한국 반도체가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됐기 때문이다. AI 데이터센터와 GPU 수요가 폭발하면서 메모리 공급 부족이 산업 전반의 병목으로 떠올랐고, 그 병목을 푸는 핵심 축을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메모리 업체들이 쥐고 있다. 최고 기업 엔비디아조차도 줄을 선다.
아무리 뛰어난 설계도가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사업을 키울 수 없다. 2026년 6월 삼성전자가 세계 상장사 시가총액 10위권에 오른 것도 이런 AI 반도체 호황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과 중국이 사활을 건 AI 경쟁에서 부족한 자원을 쥔 쪽이 최대 수혜자다. 단순한 점유율이 아니라 남의 병목을 풀어주는 필수 파트너라는 사실이 힘의 원천이다.
문제는 정작 우리 정치권이 국민 앞에서는 정반대로 움직인다는 점이다. 정치의 존재 이유 역시 국민 삶의 병목, 즉 일자리와 주거, 노후의 막힌 길을 뚫어주는 데 있다. 반도체가 세계의 병목을 쥐어 필수가 됐듯 정치의 값어치도 국민의 병목을 얼마나 푸느냐로 정해진다. 그러나 지방선거가 끝나자마자 여야는 2028년 총선 공천권을 둘러싼 내전에 돌입했다.
더불어민주당은 8.17 전당대회를 앞두고 정청래·김민석·송영길이 당권을 놓고 충돌한다. 검찰 보완수사권을 언제 폐지할지를 두고 강성 지지층을 겨냥한 선명성 경쟁이 한창이고 일부 지지층 사이에서는 상대 진영을 향한 경멸의 표현까지 서슴지 않는다. 국민의힘도 다르지 않다. 장동혁 대표와 비당권파가 공개 최고위원회에서 “사퇴하라”며 언성을 높이고, 윤리위는 현역의원 수십명의 무더기 징계를 예고한다. ‘심리적 분당’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두 싸움의 본질은 같다. 공천권 앞에서 자기자리부터 챙기는 정치에는 늘 국민이 빠져 있다. 여권의 공천·계파 전쟁은 대통령 지지율 급락과 맞물려 국면을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은 한국갤럽의 6월 23~25일 조사에서 취임 후 최저인 51%를 기록했고 부정평가는 41%로 처음 40%대를 기록했다. 더 큰 문제는 지지층 구조의 흔들림이다. 진보·중도·보수층과 무당층에서 모두 이탈 조짐이 나타난 것은 이 위기가 단순한 등락이 아니라 핵심 지지층과 중도가 함께 흔들리는 복합위기임을 보여준다.
‘없어서는 안될 존재감’ 반도체에게 배워라
여권에서 해법을 두고 진영은 갈린다. 핵심 지지층부터 다지자는 ‘증축론’과 중도로 외연을 넓히자는 ‘재건축론’이 맞선다. 둘 다 일리가 있고 사실 충돌하지도 않는다. 반도체가 ‘메모리 강국’에 머물지 않고 AI 시대의 플랫폼 인프라로 스스로를 다시 규정하며 기존 메모리 기반을 다지는 동시에 파운드리와 피지컬 AI로 외연을 넓힌 것과 같다. 정치도 핵심 지지층을 단단히 하면서 중도로 나아갈 수 있다. 관건은 방향이 아니라 누구를 보고 있느냐다. 서로의 자리를 보면 증축과 재건축은 충돌하지만 국민을 보면 둘은 한 방향이 된다.
반도체가 세계의 줄을 세운 비결은 분명하다. 없으면 안되는 존재가 됐기 때문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국민 삶의 병목을 풀어주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면 지지는 굳이 구걸하지 않아도 따라온다. 그 자리를 비워둔 채 자기들 자리만 다투면 여야 모두 공멸한다. 국민은 내 일자리와 내 집, 내 노후의 병목을 누가 풀어주느냐를 본다. 반도체는 이미 그 답을 보여주고 있다. 정치가 살길은 자리가 아니라 국민에게 있다.
김기수 정치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