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기 자백에 커진 경찰 수사 책임
강간 목적 인정, 놓친 증거들 다시 주목 … 특별수사단, 수사 판단·지휘라인 조사 확대
광주 여고생 살인범 장윤기가 법정에서 강간 목적 살인을 인정하면서 경찰의 초동수사를 둘러싼 책임론이 커지고 있다. 경찰이 확보했거나 확보할 수 있었던 단서들이 강간 목적 범행을 뒷받침하는 핵심 근거로 확인됐고,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특별수사단과 검찰 수사도 당시 수사 판단과 지휘라인으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14일 법조계에 따르면 광주지방법원 형사13부(부장판사 이정호)는 전날 열린 강간살인 등 혐의 2차 공판에서 장윤기가 검찰의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했다고 밝혔다. 장윤기는 그동안 검경 조사에서 “여학생인 줄 몰랐다” “자살을 결심하고 누군가를 데려가려 했다”며 우발적 범행을 주장해왔다.
장윤기는 지난달 검찰에 제출한 의견서에서도 강간 목적을 부인했다. 당시 그는 “검찰이 일부 정황만으로 강간 목적을 단정했다”며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같은 달 열린 첫 공판에서도 강간 목적 인정 여부는 다음 기일에 밝히겠다며 판단을 미뤘다.
하지만 검찰은 보완수사를 통해 강간 목적 범행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잇따라 확보했다. 사건 당시 블랙박스 영상과 차량에서 발견된 대형 케이블타이, 범행 이틀 전 다른 여성을 상대로 저지른 성범죄, 장윤기 주거지에서 발견된 훼손된 리얼돌 등을 공판에서 제시했다. 장윤기는 이 같은 증거가 공개된 뒤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했다.
특히 블랙박스 영상에는 장윤기가 귀가하던 피해자를 약 15분간 뒤따른 뒤 차량 뒷문을 미리 열어둔 채 접근해 피해자를 차량 쪽으로 끌고 가려는 모습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 영상과 폐쇄회로(CC)TV를 함께 분석해 범행 과정을 재구성했다.
케이블타이는 경찰 수사의 허점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꼽힌다. 경찰은 사건 당일 장윤기 차량을 감식하는 과정에서 조수석 수납공간에 있던 대형 케이블타이를 발견했다. 현장을 촬영한 사진과 수사보고서도 작성했지만 증거물로 확보하지 않았다. 관련 보고서도 검찰에 송치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후 검찰은 장윤기 부친의 자택에서 해당 케이블타이를 확보했다.
화물차 블랙박스 영상 역시 검찰이 화질을 개선하는 보완수사를 거쳐 확보한 핵심 물증이다. 검찰은 화질 개선 이전 CCTV에서도 차량 뒷문이 열린 흔적을 확인했고, 블랙박스 영상과 함께 분석해 범행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다. 경찰은 이 자료들을 강간 목적 범행을 입증하는 단서로 연결하지 못한 채 일반 살인 혐의를 적용해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지휘부로 향하는 수사 = 특별수사단의 수사는 증거 누락 여부를 넘어 당시 수사 판단과 지휘 과정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특별수사단은 광주경찰청 형사과와 광산경찰서 여성청소년과 관계자, 당시 수사팀원 등 7명을 참고인 신분으로 불러 조사했다. 장윤기의 다른 여성 대상 성범죄와 여고생 살해 사건을 분리해 수사한 경위, 강간살인이 아닌 일반 살인 혐의를 적용한 의사결정 과정 등을 확인하고 있다.
앞서 특별수사단은 광주경찰청 청장실과 수사부장실, 강력계장실 등을 압수수색해 확보한 자료를 분석하고 있다. 당시 확보된 증거가 보고 과정에서 누락됐는지, 강간살인 가능성을 배제한 판단이 어떤 보고체계를 거쳐 이뤄졌는지 등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검찰도 당시 광산경찰서 형사과장을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조사했다. 증거인멸 방조 혐의와 함께 일반 살인 혐의 적용 과정에 상급자의 개입이 있었는지 확인하는 데 수사를 집중하고 있다.
◆유족 “사건 전면 재조사해야” = 피해자 유족과 시민단체는 공판이 열린 이날 광주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건 전면 재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촉구했다.
유족은 “새롭게 드러난 사실을 토대로 사건을 다시 수사해야 한다”며 “은폐되거나 왜곡된 수사 결과로는 사건의 진실을 밝힐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채원양의 어머니는 “조작되고 은폐된 수사 결과를 바탕으로 재판이 진행된다면 아이의 억울함을 제대로 밝힐 수 있겠느냐”며 “우리 아이의 억울함보다 조직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했느냐”고 경찰을 향해 물었다. 이어 “경찰 가족이라고 달라져서도 안 되고 평범한 국민이라고 소홀히 다뤄져서도 안 된다”며 성역 없는 진상 규명과 장윤기에 대한 법정 최고형 선고를 촉구했다.
장윤기의 자백으로 이번 사건은 피고인의 형사책임을 가리는 재판을 넘어 당시 경찰 수사의 적절성을 검증하는 국면으로도 접어들었다. 앞으로 특별수사단과 검찰 수사는 당시 수사 판단이 단순한 과실이었는지, 지휘라인까지 포함한 조직적 문제였는지를 가리는 데 초점을 맞출 것으로 보인다.
장세풍·홍범택 기자 spj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