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비사업 권한 이양’ 목소리 키우는 자치구
사업 속도 높여야 vs 현장 혼란 가중
법개정 필요한 사안, 시·구 충돌 지양
서울시의 정비사업 권한 일부를 자치구로 이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
21일 내일신문 취재에 따르면 지난 6월 지방선거 과정에서 제기됐던 ‘정비구역 지정권 자치구 이양’ 주장이 선거 이후에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오히려 서울시내 재개발·재건축 사업이 활발한 자치구를 중심으로 여야를 가리지 않고 공감대가 확산되는 분위기다. 다만 서울시는 사업 일관성과 안정성을 이유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고, 정비업계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아 당분간 논쟁이 이어질 전망이다.
자치구 주장의 핵심은 500가구 미만 소규모 정비구역의 지정 권한을 서울시에서 구로 넘기자는 것이다. 정비사업은 정비계획 수립, 정비구역 지정, 조합설립, 사업시행인가, 관리처분인가 등을 거쳐 진행되는데 이 가운데 정비구역 지정은 서울시 권한이다. 이후 대부분의 인허가 절차는 자치구가 맡고 있다.
권한 이양을 주장하는 자치구들은 사업 속도를 가장 큰 이유로 든다. 서울시가 25개 자치구의 정비구역 지정 업무를 모두 처리하면서 병목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비구역 지정만 빨라져도 전체 사업 기간을 상당 부분 단축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지방선거 당시 더불어민주당은 물론 국민의힘 소속 일부 구청장들도 이같은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실제 정비사업을 추진하는 자치구들은 현장을 가장 잘 아는 기초자치단체가 초기 단계부터 권한을 행사해야 주민 요구를 신속하게 반영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신속통합기획 등으로 정비사업이 늘어난 만큼 기존 권한 배분으로는 증가하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반면 서울시는 권한 이양에 신중한 입장이다. 신속통합기획 도입 이후 정비구역 지정 속도가 과거보다 크게 개선됐고, 시 차원의 통합적 도시계획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판단이다. 서울시는 자치구별로 서로 다른 기준이 적용될 경우 사업의 예측 가능성이 떨어지고, 도시계획의 일관성도 훼손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정비업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리지만 우려가 적지 않다. 서울시 정비사업연합회는 최근 서울시가 개최한 민관협의회에서 “현재도 대부분의 인허가 권한은 자치구가 행사하고 있다”며 “인허가 병목의 원인을 모두 서울시로 돌리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오히려 자치구별 행정 역량과 업무 처리 속도 차이가 더 큰 문제라는 주장이다. 일부 사업장에서는 같은 유형의 사업이라도 자치구에 따라 처리 기간과 기준이 크게 달라지는 사례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자치구마다 정비사업 경험과 전문인력 규모는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재개발·재건축이 활발한 자치구는 전문성을 축적한 반면 사업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자치구는 조직과 인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평가도 있다. 권한만 일괄 이양할 경우 행정 편차가 오히려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제도적 한계도 있다. 정비구역 지정 권한은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에 근거하고 있어 서울시가 자체 판단만으로 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권한 조정을 위해서는 법 개정 또는 정부 차원의 제도 개선이 선행돼야 한다. 결국 서울시와 자치구 간 합의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국회와 국토교통부 논의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전문가들은 속도와 일관성이라는 두 가치 사이의 균형이 중요하다고 본다. 정비사업 활성화를 위해 절차 단축은 필요하지만, 권한 이양만으로 사업이 빨라진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충분한 전문인력 확보와 통일된 심의 기준 마련이 함께 이뤄져야 실질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오는 9월 서울시구청장협의회 정기회의로 눈길이 쏠린다. 협의회가 정비구역 지정 권한 이양 건의를 공식 안건으로 채택할 경우 서울시와 자치구 간 권한 조정 논의는 한층 본격화될 전망이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자치구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서울시의 반대 기조도 확고한 상황”이라며 “법개정도 필요한 사안인 만큼 충돌하기 보다 사업 속도를 높이고 행정 일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형 기자 brother@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