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게 손길 내미는 아세안과 러시아

2026-07-24 13:00:03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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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협력 등 실리 중요한 아세안 … 국제적 고립 탈피·다극 질서 재편 노리는 러시아

6월 17일(현지시간) 러시아 카잔 국제공항에서 아세안·러시아 기념 정상회의(ASEAN-Russia Commemorative Summit) 참석을 위해 도착한 아누틴 찬위라꾼 태국 총리(가운데). AFP=연합뉴스
지난 6월 15~17일과 17~18일에는 G7 정상회의와 아세안-러시아 특별 정상회의가 각각 프랑스의 에비앙과 러시아의 카잔에서 거의 동시에 개최돼 전례 없는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고조되는 시대에 두 정상회의가 시기적으로 겹친 때문이다. 두 회의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4년 4개월째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바라보는 양측의 시각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최근 러시아와 아세안의 관계는 이란 전쟁으로 촉발된 에너지 협력 다변화 필요성을 포함한 실리적 경제 협력과 다극화 외교 노선을 중심으로 뚜렷한 밀착 세를 보이고 있다. 이번 아세안-러시아 특별 정상회의에는 미얀마를 제외한 아세안 10개국 정상과 대표단이 대거 참석했다. 서방의 제재 속에서도 동남아시아 전체가 러시아와 마주 앉았다는 점에서 러시아의 외교적 확장성과 다극화 전략이 성과를 거두었다는 평을 받았다.

우크라전보다 미·중 갈등이 더 급한 아세안

이번 정상회의가 특별히 주목을 끈 것은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푸틴 대통령과 동남아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첫 다자정상회의이었기 때문이다.

아세안 정상들이 단체로 러시아에 모이는 것도 2016년 소치 정상회의 이후 10년 만이다. 특히 서방이 G7 정상회의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연대를 논의하는 시점에 열린 만큼 푸틴의 맞불 외교 성격도 짙다는 평가가 나온다. 서방의 강력한 대러시아 제재와 고립 압박 속에서도 아세안 국가들은 독자적인 외교적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러시아와의 채널을 열어두고 있다.

유럽과 달리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은 최우선 순위의 지정학적 위협이 아니다. 아세안 내에서는 미·중 갈등이나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 대처하는 것이 더 시급한 과제이다.

아세안은 미국이나 중국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선택지를 넓히는 외교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미국·유럽의 대러 압박에 순순히 동참하기보다는 러시아라는 카드를 유지함으로써 외교적 ‘기동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목적이 크다. 베트남, 미얀마, 라오스 등 전통적으로 친러 성향이 강한 회원국들뿐만 아니라, 최근 말레이시아나 현 아세안 의장국인 필리핀 등도 경제적.전략적 이유로 러시아와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

서방 제재가 키운 동남아의 전략적 가치

요약하자면 현재 러시아와 아세안은 서방의 견제 속에서도 “에너지·자원 공급망 확보(아세안)”와 “국제적 고립 탈피 및 다극질서 형성(러시아)” 이라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그 어느 때보다 실리적인 밀착 행보를 보이고 있다.

푸틴 시대에 ‘러시아의 동남아 관계’ 최근 저서 저자인 이언 스토리 싱가포르 동남아문제 연구소(Yusof Ishak Institute) 수석연구원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그 결과로 초래된 서방 제재의 벽은 모스크바에 대한 동남아의 중요성을 크게 증가시켰다고 작년 외교전문지 디플로맷(The Diplomat)과 인터뷰에서 주장한 바 있다.

그는 또 대다수 아세안 국가가 자국의 직접적인 이해관계와 무관한 문제로 강대국 간 갈등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설명했다. 정상회담 성명에 담긴 화려한 수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더라도, 실질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분야에서는 러시아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이는 아세안 회원국들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우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를 국제적 부랑자 국가로 바라보는 서방의 시각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싱가포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싱가포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실명으로 러시아를 비난하고 경제제재를 부과한 유일한 동남아 국가이다.

이와 관련 이번 러시아-아세안 정상회의 계기 푸틴 대통령과 별도 양자회담을 한 후 로렌스 웡 싱가포르 총리는 “싱가포르가 러시아의 침략을 반대한 것은 다른 어느 국가와 동맹(제휴) 때문이 아니라 우리는 모든 국가의 주권과 영토보전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화관계 35주년, 카잔에 다시 모인 정상들

아세안은 주요 대화 상대국과 특별한 계기에 대화 상대국에서 대화 상대국 정상과 아세안 전체 회원국 정상이 참석하는 가운데 ‘특별정상회의’를 공동으로 개최하는 관행을 유지해 오고 있다. 대개의 경우 대화관계 수립 특정 해를 특별히 기념할 공감대가 형성되는 해를 지정해 개최한다.

이는 아세안 의장국에서 매년 아세안 관련 정상회의 계기에 개최하는 아세안과 대화 상대국 간 통상적 양자 정상회의와는 차이가 있다. 러시아는 약 10년 전인 2016년 5월 소치에서 러시아-아세안 대화 관계 수립 25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정상회의를 개최했으며, 그 다음 러시아-아세안 특별정상회의가 이번에 양측 대화관계 수립 35주년을 기념해 열렸다.

한국과 아세안은 현재까지 총 3차례 특별정상회의를 개최했다. 제 1차는 2009년 6월 제주에서 한-아세안 대화관계 수립 2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됐고, 2차는 양측 대화관계 수립 25주년을 기념해 2014년 12월 부산에서 개최됐다. 3차는 2019년 11월 대화관계 30주년을 기념해 역시 부산에서 개최됐다. 당시 ‘제1차 한-메콩 정상회의’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와 함께 연계돼 열렸다.

이번 러시아 카잔 특별정상회의는 미얀마 정상을 제외한 전체 아세안 회원국 정상이 참석한 가운데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올해 아세안 의장국 필리핀의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이 공동 주재했다. 회의에서 러시아-아세안 양측은 △카잔 선언 2026‘아세안-러시아: 다양성 속 통합-함께 한 35년’ △아세안-러시아 에너지 협력 공동성명 △아세안-러시아 문화 협력 공동성명 △아세안-러시아 전략적 동반자 관계 이행 행동계획(2026-2030) 등 총 4개의 회의 결과 문서를 채택했다.

앞서 2019년 부산 정상회의에서 양측은 △공동 비전 성명 △공동 의장 성명 △사람·평화·번영의 동반자 관계 구축을 위한 한강-메콩강 선언 등 3가지 주요 회의 결과 문서를 채택한 바 있다.

브릭스·SCO로 넓어진 아세안의 외교 지평

최근 지정학적 불확실성 속에서 아세안의 외연 확대가 돋보인다. 아세안은 미중 전략경쟁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 속에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 ‘아세안 중심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브릭스(BRICS), 상하이협력기구(SCO)등 중·러의 입김이 강한 신흥국 중심의 협력체들과 실리적인 관계를 추구하고 있다.

아세안은 스스로를 글로벌 사우스의 가장 성공적인 모델이자 핵심 축으로 인식하면서 강대국(글로벌 노스)과 개도국(글로벌 사우스)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며, 국제무대에서 개도국의 권익을 대변한다.

최근 브릭스가 세를 불리면서 아세안 국가들의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특히, 인도네시아는 이미 브릭스의 정회원으로 가입했으며 말레이시아, 태국 및 베트남은 브릭스의 파트너 국가가 되었다.

이는 미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겠다는 전략적 헤징이며 서방 중심의 G7에만 의존하지 않고, 신흥 경제 블록과의 무역·투자 채널을 넓히려는 목적이 크다.

다만 브릭스가 지나치게 반서방·친중 성향의 정치 블록으로 변질되는 것은 경계한다. 아세안에게는 미국·EU 등 서방과의 경제적 연결 고리도 매우 중요하다고보기 때문이다. 상하이협력기구(SCO)는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유라시아 지역의 정치·경제·안보 협력체이다. 아세안과 SCO의 관계는 앞선 두 기구 또는 협의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거리가 있지만, 접점은 꾸준히 늘고 있다.

유라시아 대륙과 동남아시아 해양을 잇는 지정학적 연결 고리로서 상호 협력하며 아세안 회원국 중 캄보디아가 SCO의 대화 파트너로 참여하고 있다.

작년 중국 개최 ‘SCO+’ 정상회의에 당시 아세안 의장국 말레이시아의 안와르 총리가 아세안 대표로 초대받아 참석한 바가 있다. 경제적 실리를 챙기는 브릭스와 달리, SCO는 군사·안보적 성격이 짙기 때문에 아세안 차원에서 일정 부분 거리두기를 유지하고 있다.

외교적 지렛대 넓히고 돌파구 찾는 아세안

아세안은 SCO와 협력하되, 이로 인해 미국 등 서방 진영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을 경계한다. 아세안은 브릭스나 SCO 같은 대안적 협의체를 서방 중심 질서에 균열을 내는 도구로 보기보다는, 자신들의 몸값을 높이고 외교적 선택지를 넓히기 위한 레버리지로 활용하고 있다.

아세안 지역은 이란 전쟁을 계기로 에너지 위기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경제 성장의 옥죄임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어야 했다. 에너지와 무역·투자 다변화, 다각화 필요성을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다.

이제 세상을 더 넓게 보면서 국가 경영의 잠재적 위험 요소를 간파하고 미리미리 대비해나가는 지혜 축적이 필요한 시간이라고 본다. 이란 전쟁이 촉발한 작금의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위기가 아세안 국가들이 러시아와 협력을 증진해야 할 추가적인 동인을 제공한 것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정해문 전 태국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