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에 짓밟힌 민생│② 뒤집힌 경제 공약
경제민주화 흐지부지, 고용안정은 '역주행'
재벌중심 경제정책으로 회귀 … 드러나는 '뒷거래' 정황
소득불평등 그대로 … 비정규직 비중 증가세로 돌아서
지금은 거론조차 잘 되지 않지만 '경제민주화'는 2012년 대통령선거 당시 국민들로부터 가장 큰 호응을 얻었던 박근혜 대통령의 대표 공약이었다. '공정하고 투명한 시장 질서를 확립하고 균등한 기회와 정당한 보상을 통해 대기업 중심의 경제 틀을 중소기업, 소상공인과 소비자가 동반발전하는 행복한 경제시스템으로 바꾸겠다'던 약속은 중소서민층의 표심을 사로잡았고, 박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거론조차 되지 않는 경제민주화 공약 = 한계에 다다른 재벌 중심 성장 모델의 대안으로, 또 양극화와 소득불평등을 해소해 중소서민들의 민생을 보듬어줄 정책으로 기대를 모았던 경제민주화는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취임한 지 반년도 안 된 2013년 7월 박 대통령은 '경제민주화가 거의 끝에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며 사실상 종결선언을 했고 그 이후 경제민주화는 크게 진전된 것이 없다.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재벌 대기업의 신규순환출자가 금지됐고, 총수일가의 일감몰아주기에 대한 규제장치가 마련됐다. 또 부당하도급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 대상 확대, 불공정 하도급 특약 금지, 가맹점 심야영업 강요 금지 등 경제적 약자의 권익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하도급법과 가맹사업법 등이 개정됐다.
하지만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등에 대한 형량강화, 대기업 지배주주 경영자의 중대범죄에 대한 사면권 제한, 증권집단소송법상 자격요건 및 허가요건 등 완화,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 개정 등 경제민주화의 핵심공약들은 전혀 이행되지 않았다.
그나마 재벌총수 일감몰아주기 규제는 대상이 대폭 줄고, 신규순환출자금지는 다수의 예외규정을 허용하는 등 통과된 경제민주화 법안도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는다.
재벌중심의 경제구조 개선과 소득불평등 해소라는 당초 목표에는 한참 미달했지만 경제민주화는 흐지부지됐다.
노동정책은 아예 공약과는 거꾸로 갔다. 박 대통령은 선거 당시 '일자리 늘지오(일자리를 늘리고, 지키고, 질을 올린다)'를 내걸고 고용안정 및 정리해고 요건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구조조정 등 고용불안이 나타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면서 '정리해고 전 업무재조정, 무급휴직, 근로시간 단축 등 기업의 해고회피노력 의무를 강화하겠다'고 했었다. 또 상시·지속적 업무를 담당하는 비정규직은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하겠다고 공약했다. 근로자들은 당연히 고용안정성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정부는 2014년 하반기 4대 개혁의 하나로 노동개혁을 추진하면서 저성과자 해고, 파견업무 확대 등 오히려 고용안정성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들고 나왔다.
◆"정경유착, 직접적이고 노골화" = 정책기조가 크게 바뀌었지만 납득할만한 정부의 설명은 없었다. 경제민주화는 성과가 많았고, 노동개혁은 청년고용 확대를 위한 것이라는 강변만 있었다.
뒤늦게 최순실 사태가 불거지며 이같은 정책 변화에 '뒷거래'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실제 경제정책 방향이 재벌 우호적으로 바뀌는 동안 최씨가 미르·K스포츠재단 등을 통해 재벌들로부터 수백억원을 챙기려한 정황들이 드러났다. 삼성그룹이 승마선수인 최씨의 딸에게 수십억원을 직접 지원한 사실도 밝혀졌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들을 보면 경제민주화가 후퇴하게 된 배경에 재벌과의 뒷거래가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며 "과거의 정경유착이 더 직접적이고 노골화될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공교롭게 재벌 총수들과 만남이 있을 때마다 박 대통령의 경제정책 관련 발언은 달라졌다.
2013년 8월 10대 그룹 총수 오찬에서 박 대통령은 "상법 개정안에 대한 우려를 잘 알고 있다"고 했고, 정부가 추진해오던 상법개정은 중단됐다.
지난해 7월24일에는 재벌 총수 17명과 창조경제간담회를 갖고 한류확산에 협조해줄 것을 당부했다. 그로부터 13일이 지난 8월6일 대국민담화에서 박 대통령은 재계가 요구해왔던 노동개혁을 첫 번째 개혁과제로 꼽으며 강력히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미르재단이 출범한 지난해 10월 27일 박 대통령은 시정연설에 나서 서비스발전기본법과 관광진흥법의 조속한 국회처리를 주문했다. 이들 법안 역시 재계가 원하던 것들이다.
박 대통령은 K스포츠재단이 설립된 올해 1월13일에도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노동개혁법안 처리를 강조했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기업지배구조를 투명하게 하는 내용의 상법개정안만 통과됐더라도 재벌들이 미르와 K스포츠재단에 수백억원의 자금을 지원하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국민연금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지지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경제정책이 재벌의 로비에 따라 뒤바뀌었는지 검찰 수사과정에서 분명하게 밝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벌의 국정농단도 뿌리뽑아야" = 경제민주화가 중단되고 노동정책이 역주행하면서 중소서민층의 생활은 박 대통령의 약속과 달리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다.
당장 가구소득(명목기준) 증가율은 2012년만 해도 6.1%에 달했으나 2013년 2.1%로 뚝 떨어졌고, 2014년 3.4%로 살짝 오른 뒤 지난해에는 1.6%로 주저앉았다. 올 1분기와 2분기 증가율은 각각 0.8%로 0%대 머물고 있다.
소득분배도 크게 나아진 게 없다. 시장소득 기준 지니계수(수치가 높을수록 불평등이 심함을 의미)를 보면 2012년 0.338에서 2015년 0.341로 되레 불평등이 심화됐다. 처분가능소득 기준 지니계수는 0.307에서 0.295로 다소 개선됐으나 여전히 미흡한 수준이다. 그나마 통계청 지니계수는 자산소득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실제 불평등도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임금격차도 해소되지 않았다. 고용부에 따르면 지난해 대기업 상용근로자 임금은 5.3% 오른 반면 중소기업은 2.4% 증가하는데 그쳤다. 이에 따라 2014년 62.3%였던 대기업 대비 중소기업 근로자의 평균임금은 62%로 관련 통계가 나오기 시작한 2008년 이후 최저치로 떨어졌다. 대기업 근로자가 100만원을 받는다면 중소기업 근로자는 62만원을 받는다는 의미다.
비정규직은 2012년 591만1000명에서 올해 644만4000명으로 늘었다. 임금근로자 중 비정규직 비중은 2012년 33.3%에서 2014년 32.4%로 줄었으나 지난해 32.5%, 올해 32.8%로 다시 증가하는 추세다.
홍종학 더불어민주당 전 의원은 "최근 경제침체의 가장 큰 원인은 중산서민층 소득이 정체돼 소비가 줄고 있다는 점에 있다"며 "19대 국회에서 야당이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경제민주화를 추진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박 대통령이 약속했던 경제민주화 공약이 어느 정도 이뤄졌다면 경제상황은 지금보다 훨씬 나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최순실 사태를 계기로 드러난 정경유착의 고리를 이번에는 완전히 뿌리 뽑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상인 교수는 "재벌에 의한 국정개입은 더 집요하고 은밀하게 이뤄져 정부 정책을 재벌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꾼다는 점에서 최씨의 국정농단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라며 "이번 사태를 계기로 특정인에 의한 국정농단 뿐 아니라 재벌에 의한 국정농단도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순실에 짓밟힌 민생' 연재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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