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최대기업 ‘씨’, 현금풀기 지속가능할까
2021-03-22 11:58:05 게재
닛케이아시아 “브랜드 구축 어려워 ... 장기적으로 충성고객 확보에 실패할 우려”
지난해 코로나19 팬데믹이 인도네시아 전역을 강타하면서 집에 틀어박힌 사람들은 전자상거래에 대거 몰렸다. 처음엔 생존을 위해서였지만 점차 습관이 됐다. 식음료에서 금융상품까지 모든 것을 전자상거래에 의존하게 됐다.
닛케이아시아 최신호에 따르면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씨’(Sea Ltd)는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전세계 가장 성공한 기업 중 하나다. 뉴욕증시에 상장된 이 기업 주가는 지난 한해 395% 상승했다. 디지털 리서치기업 ‘아이프라이스’에 따르면 씨의 전자상거래 자회사 ‘쇼피’는 최대 방문객을 자랑하는 플랫폼이 됐다. 입소스 인도네시아에 따르면 디지털결제기업 ‘쇼피페이’는 인도네시아 국민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서비스가 됐다.
동남아 최대시장인 인도네시아에 씨가 등장하기 전, 10억달러 이상의 가치를 가진 세곳의 비상장 유니콘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고젝’과 ‘그랩’은 오토바이택시 서비스로 시작했다가 식음료 배달과 디지털결제 등의 서비스로 영역을 넓혔다. ‘토코피디아’는 전자상거래 선구자 중 하나였다. 온라인에서 사고파는 개념을 대중화시킨 기업이었다. 이들은 수백만명의 비공식 부문 노동자들을 보다 구조화된 시장에 합류시켰고 기존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이제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씨가 잠잠했던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인도네시아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존재감을 각인시키고 있다. 아이프라이스에 따르면 씨의 자회사 쇼피는 2020년 2분기 태국에서, 3분기 필리핀에서 알리바바가 지원하는 전자상거래 기업 ‘라자다’를 제치고 가장 많은 방문객을 보유한 기업이 됐다.
싱가포르 ‘DBS그룹’ 애널리스트인 사친 미탈은 “씨의 야심은 확실히 동남아시아 전자상거래를 뛰어넘는다”며 “다른 영역으로 확장할 준비를 마쳤다”고 말했다. 씨는 막대한 고객기반을 핀테크사업 확대에 활용할 계획이다.
지난해 주가상승 400% 육박
지난해 전자결제와 전자상거래 부문에서 우뚝선 씨는 식음료 배달 같은 다른 사업영역에선 조용히 움직이고 있다. 투자자들은 씨가 모든 영역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상황이다. 지난해 주가급등으로 씨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가치 높은 상장기업이 됐다. 투자자들은 씨가 동남아 전체 지역을 지배할 가능성에 베팅하고 있다.
씨의 급성장에 경쟁기업들 역시 칼날을 벼리고 있다. BCG디지털벤처스의 이사인 한노 슈테크만은 “씨는 레알마드리드와 비슷한 문제에 직면했다”며 스페인의 가장 성공적인 축구클럽에 빗댔다. 그는 “당신이 선두에 있으면 모든 이들이 당신을 공격하고 이기고자 한다”고 말했다.
씨를 중심으로 한 경쟁은 인도네시아 시장을 바꾸고 있다. 인도네시아 디지털경제 시장은 2020년 5배 성장해 440억달러 규모가 됐다. 전통의 적수인 고젝과 그랩이 지난해 적대감을 거두고 합병 논의를 벌이기도 했다. 두 기업의 논의는 입장차가 확연해 결렬됐다. 이젠 고젝과 토코피디아가 합병을 논의하고 있다.
씨의 가장 큰 장점은 미국 증시에 상장된 기업이라는 점이다. 필요한 자본을 신속하고 규모있게 모을 수 있다. 자본을 확충하기 위해 투자자들을 찾아 자금조달 목표와 운용계획을 설명하고 승인 받아야 하는 비상장 적수들은 상상도 못할 장점이다.
씨에게 손쉬운 자금조달은 매우 중요하다. 공세적인 판촉전략이 핵심 성장전략이기 때문이다. 씨는 무료배송에 구입 때마다 최대 30%까지 캐시백을 준다. 춘절행사와 같은 주요 이벤트 때 벤츠를 경품으로 제공하는 등 일상적인 판촉은 말할 것도 없다.
기술업계에서는 ‘현금소진’(cash burn)으로 알려진 씨의 인센티브 전략은 막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씨는 미국에 상장된 2017년부터 매출이 크게 늘었음에도 연속 손실을 내고 있다. 지난해 씨의 총매출은 전년 대비 두배 늘어 43억7000억달러가 됐다. 하지만 판매와 마케팅 총비용에 잠식됐다. 지난해 총비용은 89% 올라 18억달러였다. 결국 씨의 순손실은 16억100억달러에 달했다.
닛케이아시아는 “문제는 현금소진전략이 막대한 비용을 요한다는 것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충성스런 고객을 확보하는 데 실패할 수 있다는 점”이라며 “고객들은 종종 브랜드보다는 돈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동남아 한 기술기업 관계자는 “씨가 쏟아붓는 현금은 시장점유율을 사는 게 아니라 잠시 빌리는 것에 불과하다”며 “씨는 탄탄하고 강력한 브랜드를 갖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런 전략은 사실 씨의 경쟁기업들도 예전에 사용하던 방식이다. 이 기업들은 투자자들이 수익성을 따지며 현금소진을 멈추라고 요구하면서 그런 전략을 중단했다.
하지만 현재까지만 보면 시장은 씨의 전략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씨의 시가총액 1200억달러는 경쟁기업 그랩(140억달러)이나 고젝(100억달러)을 크게 앞선다. 또 동남아 최대 상장사다. 동남아 최대 금융기업인 싱가포르 DBS그룹이나 태국 국영석유기업 ‘PTT’ 등을 앞선다. 우버와 같은 미국의 글로벌 기술기업들보다도 높다. 이달 12일 기준 우버의 시가총액은 1120억달러였다.
유동성 접근에서 경쟁자 압도
씨의 주가급등은 여러가지 요소가 어우러졌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이 컸다. 씨의 핵심사업인 온라인게임과 전자상거래, 디지털결제는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소비자 습관의 변화 덕에 비상했다. 씨는 동남아 기업으로선 드물게 서구시장에 상장된 기업이다. 동남아 디지털경제의 잠재력을 알아보기 시작한 서구 투자자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다.
씨는 지난해 12월에 신주발행으로 30억달러 가까운 자본을 모았다. 그럼에도 주가는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한 투자자는 “씨가 확보할 수 있는 유동성은 너무 크다”며 “동남아 경쟁기업들도 씨와 동일한 운동장에 나가 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씨의 존재감은 모든 분야로 확대될 수 있다”고 말했다.
씨는 소규모 인도네시아 은행의 지배적 지분을 갖고 있다. 인터넷금융에서 경쟁하기 위한 준비 차원이다. 고젝, 그랩과 함께 또 다른 경쟁이 예상되는 부문이다. 그리고 오렌지색 점퍼를 입은 ‘쇼피푸드’ 운전자들을 보는 건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점차 일상적인 풍경이 되고 있다. 지난해 자체적인 식음료 배달서비스를 시작한 씨는 선두기업들과 경쟁하기 위해 조용히 몸집을 키우고 있다.
씨 회장이자 CEO인 포레스트 샤오동 리(Forrest Li)는 2009년 싱가포르에서 창업했다. ‘가레나’로 불리는 온라인게임사였다. 초기 후원자는 중국 텐센트였다. 현재도 주요 주주다. 가레나는 2015년 전자상거래 자회사 쇼피를 출범했다. 아이프라이스에 따르면 현재 동남아 6개국에서 가장 많은 방문자를 보유한 곳이다. 가레나는 2017년 현재의 씨로 사명을 바꿨다. 전자상거래 매출은 2020년 온라인게임 매출을 앞섰다. 하지만 게임사업은 씨가 유일하게 흑자를 내는 부문이다. 지속적으로 캐시카우 역할을 한다. 여기서 얻은 이익으로 다른 핵심사업의 성장에 자금을 댄다.
가레나는 2020년 10억100만달러 영업이익을 냈다. 2019년 대비 92% 상승했다. 스마트폰 게임 ‘프리파이어’의 인기 덕분이었다. 2017년 첫 출시된 프리파이어는 전세계 100여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인도와 브라질 인도네시아 등 인구대국에서 특히 인기다. 그 인기 덕분에 온라인게임은 최소 향후 수년 동안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낼 것으로 기대된다. 이는 전자상거래와 핀테크 성장을 위한 실탄 역할을 하게 된다.
풍부한 군자금을 보유한 씨의 등장으로 동남아 기술기업들은 전선을 가다듬고 이에 맞설 계획을 짜고 있다.
고젝과 그랩은 숙적이었다. 오랫동안 동남아에서 승차공유와 식음료 배달, 결제 등 지배권을 놓고 다퉜다. 이 두 기업은 1년 전 합병 논의를 시작했다. 양측의 투자자들은 합병기업 IPO를 통해 상당한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랩의 한 투자자는 "당시 모든 투자자들은 그랩의 가치가 140억달러, 고젝의 가치가 100억달러 된다고 생각했다. 두 기업이 합병해 상장하면 500억달러 기업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씨의 가치가 1000억달러이니 그 절반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두 기업의 합병은 경쟁이 치열하던 과거엔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들의 경쟁은 독했다. 공개포럼에서 양사의 경영진들은 상대방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도 싫어했다. 막후에선 서로를 비교하며 누가 더 나은 회사인지 싸웠다. 고젝의 공동창업자로, 현재 인도네시아 교육부장관인 나디엠 마카림은 2018년 베트남으로 사업을 확대하면서 "두 기업이 비슷한 서비스를 갖고 있는 이유는 그랩이 계속 우리 것을 베끼기 때문"이라며 "그랩은 우리보다 더 많은 돈을 쓰지만 우리에게 어떤 위협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두 기업은 지난해 2월 합병논의를 시작했다. '제 살 깎아 먹기' 경쟁을 줄여 현금소진을 막고 수익을 높여야 했다. 씨의 주가가 급등하는 것을 지켜본 투자자들이 두 기업에 빨리 협상을 타결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하지만 결국 지난해 말 결렬됐다. 합병회사의 주식보유 비율에 합의하지 못하면서다.
협상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고젝이 합병사의 지분 40%를 요구했지만, 그랩이 동의하지 않았다"며 "그랩은 자사가 합병사의 이익에 더 많이 기여할 전망인데도 고젝이 40%나 요구하는 건 지나치다는 단호한 입장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고젝은 이후 협상 파트너를 바꿨다. 현재는 전자상거래 시장에서 씨와 직접 경쟁하는 토코피디아와 협상하고 있다. 이 기업의 가치는 약 70억달러로 평가된다. 이 사안을 알고 있는 한 관계자에 따르면 협상은 매끄럽게 진행되고 있다. 양 기업은 올해 이달 말까지 결론을 낼 작정이다. 그리고 미국과 인도네시아에서 동시상장할 계획이다. 합병기업 가치는 350억에서 400억달러 정도 예상되고 있다. 그랩과 토코피디아 모두에 투자한 일본 소프트뱅크 CEO 손정의는 이전엔 고젝-그랩 합병을 지지했지만 지금은 고젝-토코피디아 거래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는 후문이다.
이들뿐 아니라 인도네시아 여행예약 유니콘인 '트래블로카'도 최근 "올해 미국에 상장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인도네시아 전자상거래 유니콘인 '부칼라팍' 역시 최근 미국 상장을 고려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트래블로카와 부칼라팍은 '기업인수목적회사'(SPAC)를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스팩은 비상장기업 인수합병을 목적으로 하는 페이퍼컴퍼니로, 먼저 상장한 뒤 인수나 합병할 기업을 찾아나선다. 대상이 되는 기업들로선 전통적인 IPO보다 더 신속히 상장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는 고젝과의 합병이 불발된 그랩이 고려하는 옵션이기도 하다. 그랩은 미국 투자회사 '앨티미터캐피털'이 만든 스팩과의 합병을 통해 미국증시 상장을 검토중이다. 성사된다면 350억~400억달러 가치가 될 전망이다. 그랩은 향후 씨와 더 치열한 경쟁에 돌입할 전망이다. 택시예약 앱과 게임제작사로 각각 창업했던 이들은 그동안 직접 경쟁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두 기업 모두 핀테크서비스와 식음료 배달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영역이 겹치고 있다.
주요 전장은 핀테크다. 두 기업 모두 2022년 초 싱가포르에 디지털은행을 설립할 계획이다. 디지털은행 허가를 받은 건 두 기업이 유일하다. 싱가포르 금융시장은 이미 성숙했지만 이곳에서 디지털금융 노하우를 쌓은 뒤 동남아시아로 확대할 방침이다.
최대 강점이자 최대 약점
씨는 이달 초 '씨캐피털'이라는 새로운 투자회사를 발표했다. 향후 10억달러를 이 회사에 투자할 계획이다. 씨의 CEO 리는 이달 2일 기자회견에서 "사업생태계를 키우기 위해 투자하겠다. 씨캐피털은 디지털경제의 성장을 가속화하고 고객과 사업파트너, 공동체의 가치를 창출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씨는 또 인공지능(AI) 연구소를 설립할 계획이다. AI 전문가인 얀 쉬청이 이끌게 될 이 연구소는 컴퓨터 비전과 머신러닝, 멀티미디어 분석 등에 집중하며 현존 사업과 미래 사업에 대한 통찰을 얻고 이를 위한 기술을 개발하게 된다.
씨는 동남아를 넘어설 준비도 진행중이다. 중남미 최대 경제국인 브라질 등에서 전자상거래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이곳에선 이미 게임사업 관리부서를 운용중이다.
하지만 증시에서 손쉽게 자금을 얻을 수 있다는 강점은 가장 위험한 부채가 될 수도 있다. 싱가포르 국립대 전직 교수이자 현재 독립 기술컨설턴트로 일하는 제프리 펑크는 "씨는 여전히 값비싼 판촉에 돈을 쏟아붓고 있다. 단기간의 미래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펑크에 따르면 씨의 매출 대비 손실은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2/3에서 2020년 하반기 1/3로 하락했다. 이는 수익 개선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제공한다. 그는 "하지만 매출 대비 손실이 1/3에 달한다는 건 여전히 수익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의미다. 손실 비율이 낮아진 건 2020년 코로나 봉쇄로 매출이 2배 늘어났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이 얼마나 오래 손실을 감당해줄 것인가가 문제"라고 말했다. BCG디지털벤처스의 슈테크만은 "증시상장의 불리한 점은 시장의 변동성에 더욱 취약할 수 있다는 점, 더 세밀한 검증에 놓일 수 있다는 점"이라며 "분기매출이 양호하지 않을 때 갑작스레 주가가 급락해 자본조달이 막히거나 어려워질 수 있다. 또 하룻밤새 회사채 이자가 대폭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닛케이아시아는 "이는 조만간 해소될 문제는 아니다"라며 "씨의 현금소진 전략의 약점은 두둑한 판촉에 몰린 고객들이 충성심을 유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일단 씨의 돈이 전부 소진되면, 누군가 다른이가 씨를 대체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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