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법 폐지, 참여정부 왜 실패했나
열린우리당 자멸 계기
"여전히 살아있는 법"
민주당에게 국가보안법은 아픈 역사로 불린다. 참여정부 시절 국가보안법 폐지에 나섰다 실패한 전력 때문이다. 단순한 실패 정도가 아니다. 처리에 나섰다가 무산된 법안은 수없이 많지만 국보법은 이후 국정동력 상실과 정권교체까지 이어지는 빌미가 됐다는 점에서다. 국보법 폐지라는 무리한 초강수를 채택하기보다는 개정안이라는 우회로를 선택하지 못했다는 반성이 최근의 7조 폐지안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참여정부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는 2004년 9월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보안법이라는 낡은 칼을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야 한다"며 불을 지피며 시작됐다. 정부차원에서의 첫 공식 시도다. 탄핵역풍으로 인해 당시 여당인 열린민주당은 151석으로 과반을 차지해 추진동력도 생겼다. 그해 10월 열린민주당 의원 전원의 이름으로 공식 발의됐다. 같은 시기 민주노동당에서는 노회찬 의원 이름으로 국가보안법 폐지 법안 발의에 나섰다.
보수정당인 한나라당 역시 소속 의원 111명의 이름으로 2005년 4월 국보법 개정안 발의에 나섰다. 전면폐지는 아니지만 7조에 대한 개정과 함께 10조 불고지죄 등을 삭제하는 안이었다. 한나라당 역시 국가보안법을 무작정 모두 지키기는 힘들다는 판단이 깔려 있었다. 이에 따라 국보법은 전면폐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7조는 사라지는 게 대세였다.
하지만 정치 현실은 달랐다. 한나라당이 여당의 폐지안에 대해 물타기 전략으로 개정에 나선 것 있지만 열린우리당의 자멸이 부른 참사라는 분석이 나온다. 2004년 12월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박근혜 대표 등 한나라당 지도부와 '국가보안법의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부분은 개정한다'고 합의했다. 여당 단독으로 처리하지 않는다는 것도 조건으로 걸었다. 이는 열린우리당 지도부의 고민도 한몫했다. 전체 의원 이름으로 국보법 폐지에 나섰지만 50~60명 가량의 의원들이 전면적 폐지에는 부담을 느끼는 당내 분위기 등이 감안됐다. △고무 △찬양 △동조 △회합 △통신 등 5대 독소조항을 제거하는 것을 우선 추진한 것이다.
이때부터 열린우리당은 반대파와 강경파로 극심하게 갈렸다. 여야 합의안을 추인하기 위한 열린우리당 의원총회는 강경파들에게 의해 난장판이 벌어졌고 당의장은 "배신자" 소리를 들었다. 결국 이부영 의장이 사퇴했고 이후 국보법 폐지는 여야 합의가 막히며 17년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 의장은 후에 국보법 개폐의 실패를 거론하며 "열린우리당이 실질적으로 분열상태에 빠졌고 정국주도권을 완전히 잃었다"고 밝혔다. 이 의장은 "종북좌파로 국민들에게 고립됐을 뿐 아니라 노무현 정권의 레임덕도 이 때부터 시작됐다"고 회고했다. 당시 강경파였던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국보법 등 4대 개혁입법을 추진해서 노무현정부가 망한 게 아니라 못해서 망한 것"이라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낸 저서 '문재인의 운명'에서 참여정부 당시 민정수석을 두 번 하면서 끝내 못해서 아쉬움으로 남는 것 몇 가지를 거론하며 "공수처 설치 불발과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못한 일"이라고 밝혔다.
국보법이 사문화 됐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법이다. 참여정부에서 100건 이내로 줄어들었던 국보법 사건접수 건수는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평균 200건 이상을 기록했다.
대형 조직사건이나 간첩사건 등은 줄었지만 문재인정부 들어서도 사건접수는 매년 200건 가까이 된다. 북한 서적 소지만 해도 문제가 될 뿐 아니라 드라마나 영화도 수시로 걸린다. 사랑의불시착은 북한을 미화했다는 이유에서, 영화 강철비2는 미남 배우가 김정은 역할을 했다고 고발 당했다. UN도 국보법이 국제인권법을 위반했다는 결론을 내리며 4차례에 걸쳐 국보법 7조 폐지를 권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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