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대령 나종남

비무장지대 유해발굴 … 남북의 정성이 필요

2021-08-31 12:02:24 게재

2019년 여름, 업무 협조차 평택의 한미연합사령부를 방문한 적이 있다. 업무가 끝나자, 상대 미군 장교가 일행을 사령부 내부의 작은 역사관으로 안내했다. 이곳에서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6.25전쟁의 정전협정 체결 당시 사용된 탁자였으나, 정작 미군 장교는 2018년에 원산 공항에서 촬영한 미군 수송기 사진 앞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1996년부터 북한의 운산과 장진호 등지에서 6.25전쟁 중 전사한 미군의 유해발굴작업을 벌여오던 미국 유해발굴팀이 수집한 미군 유해 50여 구를 평택으로 가져오기 위해 북한으로 들어간 미군 수송기였다.

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한 자군(自軍)의 유해를 수습, 발굴, 식별하여 본국으로 송환하기 위한 미군의 노력과 정성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6.25전쟁에서도 미군은 정전협정이 체결되기 훨씬 이전인 1952년 말부터 영현업무(Grave Registration Service Units) 담당부대를 대폭 확대하여 전사자 유해수습과 송환에 대비했다. 심지어 군사분계선 이북지역에 들어가서 직접 자군의 유해를 수습할 계획까지 세웠으나, 북한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대신, 전사자 관련 정보를 북한에게 전달하여 유해수습을 요청했고, 그 결과 1954년 말까지 북한 전역과 DMZ 북쪽에서 수습한 미군 포함 유엔군 유해 약 500여 구가 송환되었다.

한편, 군사분계선 남쪽 비무장지대와 전장 일대에서 진행된 유엔군 유해수습은 약 1년 넘게 계속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약 4000여 구의 유엔군 유해를 수습하여 일본에서 활동하던 유해감식반에 넘겨졌다. 이후 약 3년에 걸친 감식 결과, 약 3000여 구의 유해가 미군 전사자로 밝혀져 가족의 품으로 돌려갔고, 비 서양인 유해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때 국군에게 맡겨진 유해들이 어떤 과정과 절차에 의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파악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당시 국군에는 유해를 감식할 인력과 기술이 부족했고, 전쟁 직후의 상황인 점을 감안할 때, 국군 유해들이 미군 유해와 유사하게 처리되었을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2019년부터 화살머리고지에서 시작된 우리 군의 비무장지대 유해발굴에서는 정전 직후 실시된 유해수습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정전협정 체결 보름 전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이 고지의 교통호에서 모습을 드러낸 여러 전투의 잔해와 그들과 함께 얽혀져 있던 수많은 유해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정전 직후 짧은 시간에 전사자 유해를 수습했으나, 총성이 멈춘 직후의 긴장이 지속되었고, 게다가 지뢰를 포함한 각종 장애물을 제대로 치우지 않은 채 유해를 수습하다 보니 모든 것이 허술했을 것이다. 국군유해발굴단과 현지 부대의 노력으로 지난 2년 동안의 힘든 발굴작업 결과, 총 2천335점(잠정 유해 404구)의 유해와 8만 5074점의 유품이 발굴되었고, 국군 전사자 유해 중 9구의 신원이 확인되었다. 많이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국방부가 공식 집계한 6.25전쟁 중 전사한 국군 장병은 13만 7899명이다. 이 중에서 전쟁 당시부터 현재까지 가족과 조국의 품에 송환된 전사자는 1만 5000여명에 불과하고, 약 12만여 위(位)의 전사자 유해는 소재조차 모른다. 국방부와 전문가들은 이들 중 약 1만여 명의 유해가 비무장지대 어딘가에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6.25전쟁 유엔 참전국 16개 군대의 전사자 약 6000여명 중에 약 1000여 명의 유해가 수습되지 않았는데, 이들이 대부분 현재의 비무장지대 어딘가에 묻혀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2018년의 9.19 군사합의에 의해 시작된 남북 공동 유해발굴은 전쟁의 아픔을 이겨내고, 남북화해와 한반도 평화로 가는 첫걸음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9월부터 시작될 최대 격전지 백마고지에 대한 유해발굴에 더 큰 성과가 있기를 기대하며, 북한도 동참하기 바란다. 정전협정 체결 장면을 목격한 탁자보다 선배 전우의 유해발굴과 송환 노력에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았던 미군 장교가 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