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부족'에서 '과잉'으로 전환될까

2021-12-16 11:49:02 게재

닛케이아시아 "반도체 기업들 잇따른 설비확장 계획에 호황-불황 사이클 우려 커져"

닛케이아시아 최신호에 따르면 싱가포르 북쪽 조호해협 인근에 대규모 공사가 진행중이다. 십여대의 크레인이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쌓고, 중장비들은 굉음을 내며 흙을 퍼올리고 있다.

이 공사현장은 싱가포르 반도체 제조클러스터 중 한곳인 '우드랜즈 웨이퍼 팹 파크'다. 총 40억달러가 투입되는 이곳엔 미국 글로벌파운드리의 새로운 반도체공장이 들어선다. 2023년 생산을 시작할 것으로 예상된다.


아랍에미리트 국부펀드인 '무바달라 인베스트먼트'가 최대주주인 글로벌파운드리는 싱가포르에 여러개의 공장을 갖고 있다. 새로 짓는 공장은 2만3000㎡로, 무균실과 행정건물 등이 들어선다. 완공되면 연간 45만개의 웨이퍼를 만들 수 있다. 싱가포르 전체적으로는 연간 약 150만개의 웨이퍼를 생산하게 된다. 글로벌파운드리는 미국과 독일에서도 공장 증설을 계획하고 있다.

글로벌파운드리 CEO 톰 콜필드는 올해 6월 열린 싱가포르 공장 기공식에서 "오늘날 반도체업계가 5000억달러 규모로 성장하기까지 반백년이 걸렸다. 이제 약 8년 뒤면 시장규모는 2배 성장해 1조달러에 달할 것"이라며 "반도체에 대한 투자금과 역량 집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역설했다.

신규 반도체공장이 들어서는 곳은 싱가포르뿐 아니다. 대만과 미국 한국 유럽 일본 등 전세계 곳곳에서 반도체공장이 지어지고 있다. 반도체 3대 기업인 TSMC와 삼성전자, 인텔을 필두로 한 전세계 반도체 제조사들은 칩 제조역량을 빠르게 늘리고 있다. '반도체 제조 장비·재료 협회'(SEMI)는 올해 7월 "2022년 말이면 전세계 30개 가까운 신규 반도체 공장이 건설되고 있을 것"으로 추산했다. SEMI는 9월 반도체 전공정을 위한 장비 투자액이 내년 1000억달러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했다. 전공정은 '노광 식각 세정 평판 이온주입 증착 열처리 측정분석'과 같이 웨이퍼 위에 회로를 새겨 칩을 완성하는 단계다. 올해 투자액도 900억달러를 넘어 역대 최고치였지만 내년 다시 기록이 깨질 전망이다.

SEMI는 "반도체 투자는 2020년부터 3년 연속 성장세를 기록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보통은 1~2년 확장하다 1~2년 정체되거나 축소되는 흐름인데, 이를 뒤바꾸는 드문 사례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전례없는 글로벌 반도체 부족 상황을 겪고 나서 반도체 기업 경영진들은 사업 확장에 과감성을 보이고 있다. 이에 더해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주요국 정부는 자국 내 반도체 제조능력 확대를 위해 수십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야기된 공급망 차질에 맞서기 위한 조치이자, 대만 등 특정국의 제조역량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성향을 바꾸기 위한 조치다.

반면 글로벌 최대 반도체 소비국가인 중국은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자족 비율 70%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국가 차원에서 거액을 투자하고 있다.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올해 8월 "그같은 야심이 중국의 기술발전을 북돋울 것이지만, 잠재적으로 생산과잉과 투자 비효율성을 낳을 수 있다. 글로벌 반도체 수급 상황에 추가적인 불확실성을 드리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1980년대부터 반도체 시장 조사기업으로 명성을 얻은 영국 옴디아의 선임 컨설팅국장 미나미카와 아키라는 닛케이아시아에 "반도체 업계에 대한 중국정부의 투자 규모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큰 수준"이라며 "과거 일본과 한국 대만 정부도 반도체 산업에 집중 투자했다. 이는 장기간에 걸쳐 꾸준하게 이뤄졌다. 하지만 중국의 반도체 투자는 일거에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자국 반도체산업의 회복탄력성을 구축하는 한편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 대한 의존도를 최소화한다는 것은 생산과잉, 인력과잉으로 이어진다는 의미다. 미나미카와 국장은 "어느 순간 반도체 공급과 수요 사이에 불균형이 생길 것"이라며 "수급 불균형은 시간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이런 주장을 펴는 게 그뿐만은 아니다. 시장조사기관 IDC는 지난 9월 올해 반도체 시장이 전년 대비 17.3%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2020년 성장률은 10.8%였다. 시장 성장을 주도한 건 모바일폰과 노트북, 서버, 전기차 등이었다. 하지만 IDC는 2023년 생산과잉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대규모로 확충된 반도체 공장들이 내년 말부터 본격 가동에 돌입하기 때문이다.

IDC 그룹 부사장인 마리오 모랄레스는 닛케이아시아에 "반도체 시장이 지속적으로 견조하게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생산시설 확대는 필요한 부분"이라면서도 "하지만 소비자 심리의 둔화세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IDC는 2022년 개인용컴퓨터 성장세가 정체될 것으로 예상했다.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재택근무나 원격근무, 온라인 강의 등 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수요가 매우 강했지만 내년엔 정점에 달한다는 것.

모랄레스 부사장은 "반도체 기업들이 발표한 투자계획 일부는 향후 미뤄지거나 아예 취소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공표된 투자 모두가 현실화할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난 10월 상장한 글로벌파운드리의 주식투자설명서에도 그같은 우려가 담겼다. 설명서는 "반도체 산업의 계절적 요인과 주기적인 생산과잉은 기업의 매출과 이익, 마진을 줄일 수 있다. 중국정부가 반도체 생산시설 확대를 위해 적극 지원하는 상황에서 반도체 수요약화와 미중 경제적 관계 악화가 결합하면, 대규모 유휴시설이 발생하고 평균판매단가가 급락하는 등의 부작용이 벌어질 수 있다"고 명시했다.

수급 전망이 그 어느 때보다 불투명한 시기이지만 주요 반도체 제조사들은 거액의 투자를 계획중이다. 올해 초부터 반도체 부족 현상이 심각해졌다. 스마트폰 제조사와 전기차, 내연엔진 자동차 제조사 등 광범위한 반도체 고객들은 필요 이상으로 주문을 했다. 향후 공급에 차질이 벌어질까 우려해서다.

이는 반도체 실수요 파악을 어렵게 만든 요인이 됐다. 미나미카와 국장은 "반도체 업계 그 누구도 실제 수요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큰 리스크"라고 말했다.

일본 반도체 기업인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의 CEO 시바타 히데토시는 지난 10월 실적발표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반도체 주문이 이중주문이고 가주문인지를 파악하는 건 수백만달러가 걸린 문제"라고 토로했다. 르네사스는 올해 역대 최고의 이익을 기록했지만, 시바타 CEO는 "취소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주문 일부를 예상이익 산출에서 배제해야 했다. 왜냐하면 부풀려진 주문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반도체시장 조사기업 VLSI리서치의 CEO로, 40년 동안 업계에 몸 담은 댄 허치슨은 "그 어떤 기업도 향후 2년을 내다보지 못하고 있다"며 "생산과잉이 일어나고 1~ 2년 뒤엔 기업들이 마이너스 성장에 진입한다. 그러다 다시 회복한다. 이는 반도체 산업의 주기적인 역사가 보여준다"고 말했다.

공급과잉이 일어날 경우 반도체 종류별로 각각 다른 영향을 받는다. 반도체 제조수탁기업들이 확충하는 설비능력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성숙한 기술에 속한다. 22~90나노미터 규모의 칩들이다. TSMC가 소니그룹과의 공동투자로 일본 구마모토에 짓게 될 공장도 마찬가지다.

이런 성숙한 기술은 센서와 마이크로컨트롤러, 전원관리칩 등 광범위한 칩에 사용된다. 현재 글로벌 반도체 부족 현상이 가장 심각한 영역이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의 조사국장인 데일 가이는 닛케이에 "주요 수탁 제조사들은 이런 칩의 생산용량을 늘리고 있다. 2021~2025년까지 약 40% 늘어날 전망"이라고 예상했다.

반면 CPU나 GPU, 인공지능(AI) 가속기, 네트워킹 프로세서 등에 들어가는 10나노미터 이하의 최첨단 칩 생산능력은 2025년까지 배 이상 커질 전망이다. 하지만 이 영역에 속한 칩들은 비중이 워낙 작았다. 글로벌 파운드리 기업들이 생산하는 전체 반도체의 11%에 불과하다. 그리고 경쟁기업도 극소수다.

가이 국장은 "우리가 걱정하는 건 성숙단계 기술의 칩 생산이다. 공급확대 효과가 본격화되는 2023~24년 시장에서 이를 받쳐줄 수요가 있을지가 관건이다. 이 영역은 경쟁이 매우 격심한 곳"이라고 말했다.

메모리칩 부문에선 이미 수요가 둔화되고 있다는 신호가 나오고 있다. 특히 팬데믹 동안 수요가 급증한 PC 판매시장이 그렇다. 8기가바이트 DDR4 메모리칩의 벌크가격은 지난 8월부터 11월까지 넉달 연속 하락했다. D램의 대표적 생산기업인 미국의 마이크론과 한국의 SK하이닉스는 재고가 완만히 줄어들고 있다고 보고했다. 마이크론은 지난 9월 "회계연도 1분기 실적전망이 시장의 기대감을 크게 밑돌았다"고 밝혔다.

관련 기업들은 투자자들에게 '장기적으로 생각해달라'고, '시설확충이 불가피한 구조적 변화를 고려해달라'고 주문하고 있다. 독일 반도체기업 인피니언 테크놀로지의 최고마케팅경영자(CMO)이자 이사인 헬무트 가젤은 닛케이에 "우리가 공장설비를 바라보는 시각은 언제나 장기적인 관점"이라고 말했다. 인피니언은 최근 오스트리아 필라흐에 위치한 신규 공장이 가동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이곳에선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차 등 자동차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생산한다.

가젤은 "우리가 2018년 필라흐에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고 밝혔을 때 사람들은 의아하게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정확한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기업으로서 계속 성장했다. 지난 20년 동안 연 평균 10%씩 커졌다"며 "구조적 성장, 지속적 성장을 믿는다면, 공장을 지어야 한다. 만약 한번에 너무 많은 생산용량을 추가했다면 잠시 쉬어야 한다. 하지만 수요는 결국 구축된 공급용량에 따라 성장한다"고 강조했다.

가젤의 말이 옳을 수 있다. 스마트폰과 PC 수요가 향후 1년 동안 감소할 수 있지만 전기차와 자율주행차, 사물인터넷(IoT), 스마트시티 등의 반도체 수요는 확실히 커질 것이다. 또 현금이 풍부한 미국 기업들이 대규모 데이터센터에 과감하게 투자하면서 클라우드 컴퓨팅 시대를 주도하고 있다. 이 역시 반도체 수요를 늘릴 전망이다.

하지만 반도체 시장이 냉각되면, 호황 때 구축한 생산시설로 공급과잉이 일어나는 건 피하기 어렵다. 미나미카와 국장은 "이런 리스크를 줄이는 유일한 길은 정확한 수요 예측이다. 하지만 이는 매우 어렵다. 특히 현재의 시장 조건에서는 더더욱 어렵다"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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