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반도체제조 전쟁 참전, 10년 전과 달라질까
이코노미스트지 "기존 강점 살려 생태계 강화하는 게 나을 수도"
2013년 유럽연합(EU)은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다. 2020년을 목표시점으로 유럽에서 생산된 반도체의 글로벌 비중을 20%로 두배 높이겠다는 것. 하지만 현재의 유럽 반도체 비중은 여전히 10%에 머물러 있다. 게다가 유럽은 데이터센터나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한자릿수 나노미터 수준의 최첨단 반도체를 만들지 못하는 상황이다. 반도체 부족이 심화되고 전 산업계에 미치는 반도체 영향력이 계속 커지는 상황을 맞아, 유럽은 10년 전과 비슷한 반도체 전략을 다시 추진하고 있다.
이달 8일(현지시각) 공개된 EU의 새로운 반도체 투자 플랜은 규모로만 놓고 보면 상황을 바꿀 수도 있다. 공공과 민간을 합쳐 430억유로(490억달러) 이상 투자할 계획이다. 300억유로 정도는 최첨단 대규모 반도체 제조공장(메가팹) 건설에, 110억유로 정도는 가상 반도체 설계 플랫폼과 파일럿 생산라인 등의 인프라 구축에 할당된다. 이는 현재 의회 심사를 거치고 있는 미국의 반도체 이니셔티브 규모와 비슷하다. 이에 대해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최신호에서 "하지만 계획과 달리 현실은 녹록지 않을 전망"이라고 전했다.
반도체 산업은 1곳당 200억달러 이상의 건설비용이 들어가는 최첨단 제조공장으로 그치는 게 아니다. 수천개의 기업들이 모인 글로벌 생태계이기도 하다. 게다가 연구개발(R&D)에 수년이 걸리고 그 비용은 수십억달러에 달한다. 최첨단 반도체는 복잡한 소프트웨어를 보유한 특수 기업들이 설계한다. 또 칩이 제조공장을 떠나면 위탁사들이 '조립하고 검사하고 포장하는'(ATP)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코노미스트지에 따르면 이같은 생태계 관점에서 EU의 포지션은 강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하다. 반도체 생산량 비중으로만 볼 게 아니라는 것. 먼저 유럽의 강점은 반도체 연구개발에서 앞서가고 있다는 점이다. 반도체 산업 주요 두뇌집단 중 하나가 바로 벨기에 IMEC(대학간 초소형전자공학센터)이다.
또 유럽 기업들은 반도체 제조공장을 돌리는 장비를 생산한다. 대표적으로 네덜란드의 ASML이 있다. 이 기업의 시가총액은 2300억유로로, 최첨단 반도체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독점 생산한다. 이 장비가 없다면 최첨단 프로세서를 식각(에칭)할 수 없다. 유럽의 여러 기업이 반도체 공급망에서 지배적인 입지를 구축하고 있기도 하다. 독일 '칼 자이스 SMT'는 ASML의 노광장비 렌즈를 만든다. '실트로닉'은 칩이 식각되는 실리콘 웨이퍼를 만든다. 아익스트론은 회로를 만들기 위해 웨이퍼 위에 올리는 화학물 레이어를 증착하는 특수장비를 만든다.
대만 TSMC나 한국 삼성전자의 한자릿수 나노미터 칩에 비하면 수세대 뒤처졌지만 유럽 최대 반도체 제조사인 인피니온과 NXP,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또한 우수한 기술력을 자랑한다. 유럽대륙 반도체 수요의 절반은 180나노미터 이상의 크기다. 자동차와 기계장비, 센서 등에 필요한 특수 반도체다. 독일 싱크탱크 'SNV'의 얀 페테르 클라인한스는 "유럽 반도체 제조사들은 유럽 고객에 초점을 맞춘다"고 말했다.
하지만 EU의 정책당국은 유럽의 강점이 약점을 상쇄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본다. 최첨단 제조공장의 부재 이외에도 반도체 설계 노하우를 가진 미국의 엔비디아와 같은 기업들이 부족하다. ATP 역시 뒤처졌다. 이는 주로 중국과 대만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반도체 전략의 초점인 메가팹 건설이 미국 또는 대만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이다. 대만 TSMC와 미국 인텔은 유럽에서 비용을 댄다면 메가팹 증설 입지로 적극 고려하겠다는 입장이다. 인텔은 총비용의 40%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한 상태다.
이를 위해 EU 집행위원회는 현행 국가보조 규정을 완화할 방침이다. 회원국들의 유치전을 우려해 몇가지 단서를 달았지만 과열경쟁을 막을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라는 지적이다.
게다가 현재의 반도체 부족상황은 메가팹이 완공되는 수년 후의 시점에선 과잉상황으로 전환될 수 있다. 또 메가팹 구축과 더불어 EU 자체의 반도체 설계기업들을 키우지 못한다면 또 다시 외국 기업들의 잔치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SNV'의 클라인한스는 "미국 기업들이 자국이나 아시아가 아닌, 유럽에서 반도체를 제조하려 하는 이유"라고 지적했다.
EU 산업정책을 담당하는 티에리 브레턴 집행위원은 유럽에 지어질 메가팹이 대륙뿐 아니라 전세계 반도체 수요를 흡수하길 기대한다. 하지만 이코노미스트지는 "기초 R&D에 투자하면서 반도체 생태계를 강화하는 게 더 나을 수 있다"며 "EU의 기존 반도체 스타기업들이 보여주듯, 유럽 반도체 시장은 알아서 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