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TO, 러시아 속여" … 푸틴은 옳은가

2022-02-16 11:34:34 게재

'동진 안한다'는 비공식 약속 깬 정황 … 슈피겔 "1990년 조약의 모순도 한몫"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의 15일자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1993년 9월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겉봉엔 '친애하는 빌에게'(Dear Bill)라고 쓰였다. 편지 첫머리에 옐친은 "그동안 미러 정상간 솔직한 의견교환이 있었다"고 언급했다.

당시는 폴란드와 헝가리, 체코공화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길 원하던 때였다. NATO는 옐친 대통령의 주요 근심거리였다. 옐친은 편지에서 "모든 국가는 동맹 가입의 자결권이 있다"면서도 "러시아공화국은 NATO의 동진 확장을 새로운 봉쇄정책으로 여긴다"고 지적했다. 옐친은 또 1990년 9월 영국과 프랑스 미국 소련 4개국과 동·서독이 모스크바에서 체결한 '2+4조약'을 언급했다. 통일 독일의 국제적 지위와 영토, 군사문제 등을 담은 조약이다. 옐친은 "당시 조약의 정신은 NATO가 동쪽으로 확장하는 옵션을 배제하는 것"이라고 썼다.

옐친의 편지는 '서방이 약속을 어겼다'는 러시아 주장의 시초다. 미국은 약속파기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 갈등은 현재로 이어진다. NATO의 동진 확장은 지난 30년 간 러시아-서방 갈등의 최대 이슈였다. 1990년에 합의된 것이 정확히 무엇이냐에 대해 양측의 의견은 극명하게 갈린다.

옐친의 편지에도 불구하고 NATO는 1999년부터 동쪽으로 확장해 2020년까지 모두 14개국가를 회원국으로 추가했다. 이에 대해 러시아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방을 비난했다.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지난 1월 말에도 "서방은 1990년대 NATO가 동쪽으로 1인치도 확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었다"며 "하지만 파렴치하게도 우리를 속였다"고 비난했다. 그는 현재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 "우크라이나를 NATO에 가입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공식문서에 담아달라"고 요구했다.

러시아 외무장관 세르게이 라브로프도 최근 서방국가 외무장관들에 보낸 공개편지에서 "1990년 각종 합의에 근거한 유럽안보헌장에서 동서 진영은 '모든 국가는 동맹을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를 갖는다. 동시에 안보는 불가분성을 띤다'는 데 동의했다"고 강조했다.

'안보 불가분성' 원칙이란 한 나라의 안보가 다른 나라의 안보와 불가분적으로 연결돼 있는 만큼 자국 안보를 위해 타국 안보를 희생시켜선 안된다는 원칙이다.

그렇다면 러시아가 NATO에 속았다는 푸틴 대통령의 말은 정당한가.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서방과 러시아 사이엔 다양한 논의가 있었다. 1990년 한해에만 러시아와 미국 프랑스 영국, 동서독 정치인과 고위급 각료들은 독일 통일과 NATO·바르샤바조약기구의 해체, 유럽안보보장협력회의(CSCE) 등을 논의하기 위해 여러차례 만났다.

당시 논의와 관련된 사람들의 기억이 언제나 일치하는 건 아니다. 1990년 당시 프랑스 외무장관이었던 롤랑 뒤마는 훗날 "NATO 군대가 이전 과거 소련의 영토였던 곳으로 가까이 진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그같은 내용을 담은 그 어떤 약속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반면 주소련 미국대사였던 잭 매트록은 "NATO가 동쪽으로 확장하지 않겠다고 소련에게 단정적으로 확언했다"며 상반되게 진술했다.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이야기도 다소 엇갈렸다. 그는 한 행사에서 "독일 총리 헬무트 콜과 미국 지도자들이 나에게 'NATO는 동쪽으로 1cm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행사에선 "NATO 확대와 관련한 이슈는 논의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그럼에도 고르바초프는 "서방세계는 1990년 합의의 바탕이 된 정신을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협상 당사자들의 진술 이외에도 풍부한 문서자료들이 존재한다. 당시 여러 회담에 참여한 각국 대표들의 대화 메모, 협상 구술서, 언론보도 등이다. 이에 따르면 미국과 영국 독일은 러시아에 '폴란드와 헝가리 체코공화국과 같은 동유럽국가가 NATO에 가입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시사했다. 1991년 3월 영국 총리 존 메이저는 러시아 방문중 "NATO의 동진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럼에도 NATO의 동진은 이뤄졌다. 옐친 대통령은 1997년 마지못해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서방세계의 강압을 버틸 수 없었다"며 불쾌감을 표했다.

슈피겔은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동서 간 법적 구속력을 갖는 합의문은 없었다. 서방세계가 말을 뒤집었는지 여부는 결국 영국 메이저 총리 등 서구 정상들의 구두약속에 얼마만큼의 구속력을 부여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전했다.

NATO의 동진에 대한 실랑이는 1990년 1월 독일 외무장관 한스 디트리히 겐셔의 제안에서 비롯됐다. 당시 동유럽 전역에서 소련의 위성정부에 대한 각국 국민들의 저항이 거셌다. 겐셔 장관은 소련의 향후 대응을 걱정했다. 1956년 헝가리 봉기의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이다. 당시 헝가리 국민 일부가 소련 주도의 바르사뱌조약기구 탈퇴를 외칠 때, 소련은 반란군 진압을 명분으로 헝가리를 침공했다. 겐셔 장관은 그같은 상황이 재연될까 두려웠다. 그는 소련을 안심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90년 1월 31일 겐셔 장관은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들에 무슨 상황이 닥치든 NATO는 관할권을 동쪽이나 소련 국경 근처로 확장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자고 제안했다. 겐셔의 발언은 영국과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동맹국에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겐셔는 영국 외무장관과의 회담에서 "헝가리의 정부가 교체된다고 해도 NATO에 가입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소련에 확인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미국 베이커 장관은 그같은 상황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서방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서방 동맹들 사이의 기본 관심사는 통일 독일이 NATO에 계속 남는지 여부였다. 바르샤바조약기구에 속한 동유럽 국가들의 미래는 당면과제가 아니었다.

2월 초 겐셔와 베이커는 차례대로 그같은 생각을 소련에 알렸다. 겐셔는 소련에 "NATO는 동쪽으로 확장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베이커 역시 "NATO의 관할범위나 세력은 동쪽으로 확대되지 않을 것"이라며 "이는 바뀌지 않는 보장"이라고 말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NATO의 동진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자 베이커는 "미국도 그에 동의한다"고 답했다.

이후 베이커는 "당시 유일한 관심사는 독일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러면서 헝가리와 폴란드의 권리를 희생해가면서 소련과 협상하는 일이 거북했다고 말했다. 겐셔 역시 소련 방문이 대단한 중요성을 지닌 건 아니라며 의미를 축소했다. 그는 "소련의 반응을 파악하길 원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안돼 2+4회담이 시작돼 9월까지 이어졌다. 겐셔는 "소련은 NATO가 동유럽으로 확장할지 여부에 대해 다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겐셔는 NATO의 동진 이슈가 해결됐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의문의 여지가 있다. 1990년 2월 초엔 동유럽 국가 일부가 NATO 가입을 원한다는 사실이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주요 신문들이 관련 내용을 계속 전하고 있었다. 소련 정부도 서구 정치인들에게 수없이 해당 내용을 언급했다.

서구 정상들은 소련을 안심시키려 일반론을 언급했을 뿐이었다. 미국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우리는 소련을 해치려는 의도나 생각이 없다"고, 프랑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개인적으로는 군사블럭이 점차 해체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NATO 사무총장 만프레드 뵈르너는 서구 동맹의 확장에 대한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이같은 일련의 발언이 시시하는 메시지는 '고르바초프가 NATO 내에서의 독일 통일을 묵인한다면, 서방은 소련의 이해관계를 고려한 서구안보기구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비공식적인 약속은 냉전시대엔 이례적인 게 아니었다. 미국 정치학자 조슈아 쉬프린슨은 1990년의 협상을,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의 해소를 이끈 미국과 소련 사이의 구두합의와 비교했다.

당시 상황에 대한 이같은 시각은 고르바초프 입장을 고려하면 타당성을 갖는다. 고르바초프가 통일 독일의 NATO 가입을 받아들이기란 극도로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독과 영국 프랑스 미국의 약속이 진정성을 담고 있지 않다고 믿었다면, 소련 지도자가 그같은 조치에 동의했을 리 없다. 독일 정부는 결국 동독지역은 원칙상 NATO 군대가 주둔할 수 없는 특수지역으로 둔다는 결정을 받아들여야 했다.

일각에선 '서방이 의도적으로 처음부터 소련을 호도했다'고 본다. 베이커는 소련 방문 몇주가 지나서 겐셔 장관에게 "일부 동유럽 국가들이 NATO 가입을 열망한다"고 말했다. 겐셔는 이에 대해 "그 이슈는 현재 절대 건드려선 안된다"고 대응했다.

당시 미국 정부엔 국방장관 딕 체니와 네오콘 차관 폴 울포위츠처럼 목소리 큰 강경론자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들은 '미국이 유일한 글로벌 강대국으로 발돋움해야 한다'고 믿고, NATO를 유럽에 대한 미국의 지배력을 강화시키는 도구로 삼고자 했던 인물들이다.

이런 상황들은 '서방이 러시아를 의도적으로 속였다'는 푸틴의 주장을 지지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슈피겔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같은 관점은 잘못된 측면이 있다"며 "1990년대는 동서 양진영 모두 선의와 오해가 뒤섞인 시기였다"고 지적했다.

고르바초프는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인권을 존중하며 동유럽 국가들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심지어 소련이 NATO 회원국이 될 가능성을 거론하기도 했다. 후임 옐친도 "우리는 다른 나라가 되고 있다"고 선언하면서 그와 비슷한 자신감을 표했다.

러시아는 개혁에 나설 준비가 된 것처럼 시간을 달라고 했다. 독일 콜 총리와 겐셔 장관, 미국 부시 대통령과 후임 클린턴은 러시아의 개혁을 믿었다. 실제 NATO의 전환을 원했고, 소련의 이해관계를 진지하게 대했다.

하지만 잠재적으로 중요한 모순이 도사리고 있었다. 한편으로 모든 나라는 '안보의 불가분성' 원칙에 따라 타국의 안보를 해쳐선 안된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나라는 어떤 동맹에 가입할지에 대한 자결권을 갖는다. 그러나 당시엔 이 모순이 단순하게 이론적 문제로만 보였다.

클린턴과 콜 등 서방 국가들은 폴란드와 헝가리 체코공화국의 NATO 가입을 수년 동안 거부했다. NATO의 확장에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비싼 것으로 여겨졌다. 동유럽 국가들 내에서 싹트는 민주주의는 아직 취약한 반면 군부의 반발은 거셌다.

하지만 그때 러시아의 개혁 속도가 둔화되면서 서방세계의 불신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미국 공화당은 정치공학적 판단을 내렸다. NATO 확대 이슈는 클린턴에 맞서 정치적 득점을 쌓을 유용한 기회라고 인식했다. 동유럽 출신의 미국인들이 중서부의 결정적인 경합주(스윙스테이트)에 많이 살고 있었다. 이 때문에 클린턴도 결국 NATO를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서방이 특정 조약을 깬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다른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NATO 확대 수년이 지나 독일 겐셔 장관은 "공식적인 법적 관점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서도 "1990년 러시아와 서방 간 암묵적 합의정신을 위반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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