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기 상징 옛동독, 유럽 전기차 허브로

2022-07-01 10:50:43 게재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최근 신규 투자·프로젝트 쇄도 … 독일 산업지도 재편할 수 있다"

불경기에 시달리던 독일 동부 브란덴부르크주의 작은 마을 구벤시는 10년 전 투자자를 유치하기 위해 공공토지를 공짜로 나눠줄 계획을 짜고 있었다. 하지만 상전벽해의 상황이 됐다. 구벤시장 프레트 마로는 "이젠 공짜 땅은 없다"고 말했다.

전환점은 지난해였다. 캐나다 리튬생산처리기업인 '록테크리튬'이 유럽의 첫번째 리튬공장 부지로 구벤시를 선택했다. 리튬은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재료다. 구벤시는 유럽 60개 이상의 도시들과 경합해 낙점을 받았다.

록테크리튬은 5억유로(약 6768억원)를 투자한다. 구벤시는 글로벌 배터리 공급망에서 중요한 연계점으로 등장할 전망이다. 마로 시장은 "구벤시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였다"며 "록테크의 입맞춤으로 공주가 잠에서 깼다"고 말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록테크의 투자는 과거 공산권이었던 옛 동독지역의 부활을 상징한다"며 "불경기의 대명사와도 같았던 옛 동독지역은 이제 유럽 전기차 공급망의 허브로 변모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 2년 동안 새로운 사업 프로젝트와 투자가 옛 동독으로 쇄도하고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프로젝트는 인텔의 투자다. 인텔은 지난 3월 작센안할트주의 주도 마그데부르크에 170억유로(약 23조원)를 들여 최소 2개의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고 선언했다. 독일 역사상 가장 큰 액수의 외국인직접투자(FDI)다.

같은 달 미국 전기차기업 테슬라는 브란덴부르크주 그륀하이데에 소재한 첫번째 유럽 공장에서 전기차 생산에 돌입했다.

독일 총리 올라프 숄츠는 이달 초 한 컨퍼런스에서 "옛 동독은 이제 유럽에서 가장 매력적인 경제지대 중 하나가 됐다"고 말했다.

FT는 "옛 동독지역에 대한 잇따른 투자 선언은 독일 산업지형이 전환되는 징조일 수 있다"고 전했다. 지난 수십년 독일의 산업 중심지는 남부와 서남부였다. 메르세데스 벤츠와 BMW 등 자동차기업, 지멘스 등 거대 공학기업들이 이곳에 자리잡았다. 하지만 동부지역이 다시 산업화의 시동을 걸면서 상황이 바뀔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독일 동독지역 장관인 카르스텐 슈나이더는 "독일 경제지도가 새롭게 재편되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 동부지역에 새로운 투자가 잇따르는 상황에서 내연기관 엔진에 기반한 독일의 전통 자동차 기업들은 전례없는 압력을 받고 있다. 전세계 각국이 화석연료 없는 미래를 꿈꾸며 전기차 시대로 속속 전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유럽연합(EU) 의회는 이달 초 '2035년을 기준으로 EU 내에서 휘발유차와 경유차를 신규 판매할 수 없다'는 내용의 표결을 통과시켰다.

보쉬와 콘티넨탈, 말레, ZF 프리드리히스하펜 AG 등 독일 남부와 서남부에 기반을 둔 전통의 자동차부품 공급기업들은 수요 감소와 불확실한 미래전망에 대규모 감원을 선언한 바 있다.

기업부지·신재생원천 등 장점

폭스바겐은 2019년 작센주 츠비카우시 소재 내연기관차 공장을 전기차 생산라인으로 전환했다. 이 공장은 과거 동독의 국민차 '트라반트'를 제조하던 곳으로 독일 통일 후 폭스바겐이 인수했다. 폭스바겐 작센의 최고재무책임자인 카렌 쿠츠너는 "옛 동독 지역 사람들은 격변에 익숙하다. 전기차 공장으로의 전환을 불이익이라고 여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폭스바겐은 츠비카우 공장에서 한해 30만대의 전기차를, 인근 드레스덴 공장에서 수천대의 전기차를 생산할 계획이다. 대략 1000개의 일자리가 새로 보태질 전망이다. 게다가 자동차용 케이블 제조사인 '레오니'가 폭스바겐 전기차 공장에 납품하기 위해 1억3000만유로를 투자하겠다고 나섰다. 츠비카우시는 완전고용 상황을 앞두고 있다. 한편 BMW는 작센주 라이프치히 공장에서 전기차 배터리모듈을 생산할 계획이다. 수백개의 일자리가 창출된다.

수도 베를린을 감싸는 브란덴부르크주 경제부장관인 외르크 슈타인바흐는 "2018년 이후 70억유로(약 9조4750억원) 투자가 유입됐다"며 "그 이전 시기와 비교하면 큰폭으로 증가했다"고 말했다. 현재 옛 동독에 속한 지방정부들은 주요 기업들이 제시한 28개 신규 투자 프로젝트(총 115억유로)에 대해 협의중이다.

투자기업들이 매력적으로 여기는 게 바로 옛 동독지역의 광활한 부지다. 인구가 많고 고도로 산업화된 다른 지역과 달리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부지가 많다.

테슬라의 그륀하이데 공장은 300헥타르(약 90만7500평) 규모다. 인텔의 마그데부르크 공장은 450헥타르(약 136만1250평) 규모로 지어질 전망이다. 이는 축구장 620곳을 합쳐 놓은 크기다. 숄츠 총리는 이달초 컨퍼런스에서 "그같은 여유공간은 유럽의 심장에서는 보기 드문 규모"라며 "수많은 기업들이 원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핵심 경쟁력이 있다. 신재생에너지 공급능력이 풍부하다는 점이다. 브란덴부르크주의 주민 1인당 신재생전기(풍력 태양광 바이오매스)는 최고 수준이다. 전기 수요의 94%를 신재생원천에서 충당한다. 독일 평균은 46%에 그친다.

독일 경제부장관 로베르트 하벡은 "투자자들은 친환경 전기자동차에 쓰일 배터리를 생산하려 한다"며 "때문에 신재생에너지 이용가능성이 주요 고려 요소다.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는 기업들이 옛 동독지역에 공장을 설립하려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국가보조금도 투자자를 끌어들이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독일정부는 2024년까지 인텔 프로젝트에 68억유로의 보조금을 지급할 계획이다. 올해 보조금만 27억유로다. 독일정부는 또 석탄사용을 단계적으로 줄이는 계획에 따른 경제적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400억유로의 기금을 책정했다. 그 기금의 상당 몫은 옛 동독지역에 할당된다. 갈탄 광산과 석탄화력발전소가 집중돼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을 유인하는 요인이 보조금만은 아니다. 옛 동독지역은 산업중심지로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작센주 드레스덴 인근에 위치한 유럽 최대 반도체 클러스터는 옛 동독의 국영 가전기업 '로보트론'의 생산공장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것이다. 보쉬와 인피니온, AMD와 같은 기업들은 고도로 숙련된 인재와 생산시설을 저렴하게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해 이 지역에 거점을 마련한 바 있다.

게다가 산학연계가 용이하다. 작센주 드레스덴에는 최고 수준의 공과대학들이 즐비하다. 또 독일정부가 지원하는 유럽 최대 응용과학연구소 '프라운호퍼'가 운영하는 산학 네트워크도 있다. 작센주의 각종 연구소들은 대개 동독 시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수십년 불경기를 역전시키다

테슬라와 인텔과 같은 글로벌 대기업들이 옛 동독지역에 진출한다는 사실은 놀랄 만한 일이다. 동독 시절 산업기반이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무너졌기 때문이다. 수백곳의 공장들이 통일 이후 10년 동안 속속 폐쇄됐다. 실업률은 치솟았고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서쪽으로 떠났다. 슈타인바흐 장관은 "동독 산업기반의 약 70%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희망이 사라지면서 좌절감과 분노가 커졌다. 극우조직 '독일을 위한 대안'(AfD), 반무슬림 운동인 '페기다'(PEGIDA·서양의 이슬람화를 반대하는 애국 유럽) 등이 등장했다. 2015~2016년 유럽 난민위기 동안 이들은 대대적인 시위를 벌여 전세계 언론의 전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브란덴부르크주 구벤시는 옛 동독의 부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마을은 19세기 모자 생산지로 명성을 얻었다. 전통적인 토끼털 모자가 아니라 비바람에 강한 양모펠트 모자로 입지를 다졌다. 동독 시절엔 주요 산업중심지였다. 수백명을 고용하는 합성섬유공장이 가동됐다. 하지만 통일 이후 동독 지역의 화학산업은 붕괴했고 구벤시도 함께 쇠락했다.

마로 시장은 "직물공장과 모자공장, 양탄자 짜는 실 공장 등 모든 생산시설이 폐쇄됐다"며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았다"고 회상했다. 마을의 인구는 3만6000명에서 1만6700명으로 절반 이상 감소했다. 1990년대 말 실업률은 27%에 달했다.

지난 2년여를 제외한 과거 30년 동안 구벤시가 끌어들인 새로운 기업은 단 1곳에 그쳤다. 침대 매트리스 제조기업 '메가플렉스'였다. 게다가 수백명 주민을 고용하던 인근 석탄화력발전소가 독일정부의 단계적 폐지 계획으로 2038년 문을 닫을 운명에 처했다.

다른 지역도 비슷하다. 옛 서독지역과의 경제격차가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2020년 기준 1인당 GDP는 77.9%에 그친다. 평균임금도 옛 서독지역보다 23% 적다.

구벤시는 불경기를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뛰었다. 시당국은 비어있는 공단을 정비했고 30만유로를 들여 개발계획을 발주, 지난해 완성했다. 프레트 마로 시장은 슈타인바흐 장관에게 "만약 투자자가 나오면, 그는 지체없이 투자기획을 신청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준비를 마쳤다"고 말했다. 6주 뒤 슈타인바흐 장관은 록테크리튬을 구벤시에 보냈고 바로 협상이 시작됐다.

록테크는 리티아 휘석(스포듀민)을 순수 수산화리튬으로 전환하는 공장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리타아 휘석은 리튬을 함유한 광물이고, 수산화리튬은 전기차 배터리에 들어가는 주요 재료다. 록테크는 1년 50만대 전기차 생산에 필요한 2만4000톤의 리튬 처리를 원했다. 록테크 CEO 마르쿠스 브뤼크만은 "그럼에도 유럽의 거대한 리튬 수요를 맞추기는 쉽지 않다"며 ""유럽 전기차 시장은 전세계 다른 지역을 수년 앞섰다"고 말했다.

옛 동독지역 내 다른 공급망도 속속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독일계 글로벌 화학기업 BASF는 슈바르츠하이데에 리튬이온배터리에 쓰일 양극활성재 제조공장을 짓고 있다. 호주의 알테크는 브란덴부르크주 슈바르체 품페에 음극재 생산공장을 짓고 있다. 배터리 제조사인 미국 마이크로배스트와 중국 CATL은 루트비히스펠데와 에르푸르트에 각각 공장을 건설중이다.

지난해 독일에서 생산된 전기차는 모두 32만3000여대다. 자동차시장 분석가 마티아스 슈미트에 따르면 그중 57%가 폭스바겐의 츠비카우 공장과 드레스덴 공장에서 생산됐다. 테슬라의 브란덴부르크 공장도 올해 초 문을 열면서 옛 동독지역의 전기차시장 지배력은 단단해지고 있다.

전기차와 관련한 옛 동독지역의 활발한 투자와 생산은 전통의 내연기관차 제조지역들과 대조된다. 독일 남부, 서남부에선 지난 3년 간 10만개 이상의 일자리 감축계획이 발표됐다. '유럽자동차부품업체협회'(Clepa)는 "2035년부터 신규 화석연료 차를 판매금지하는 EU의 계획으로 향후 수십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연구개발 부족, 극우성향 강세, 노동자 감소

하지만 옛 동독지역의 부활 이야기가 다소 과장된 것일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독일의 고소득 일자리 대부분은 여전히 남쪽지방에 있기 때문이다. 독일 할레경제연구소 거시경제 부서장 올리베르 홀테묄러는 "옛 동독지역에서 늘어나는 투자는 생산과 관련된 것"이라며 "하지만 혁신과 관련해 중요한 건 연구개발"이라고 말했다.

민간기업들의 연구개발 지출액을 GDP 대비로 따졌을 때, 독일 남부지역이 동부보다 2~3배 더 높다. 홀테묄러 부서장은 "남부지역은 혁신이 일어나는 곳이며 고액 연봉자들이 몰려 있는 곳"이라고 덧붙였다.

또 동부지역의 신재생에너지 발전 속도가 매우 인상적이지만, 러시아의 가스공급 무기화는 단기적으로 에너지 부족 상황을 촉발할 수 있다. 드레스덴 소재 한 반도체 제조사는 FT에 "당국에서 올 겨울 에너지대란이 생기면 가스공급이 배급제로 전환될 수 있다고 고지했다"고 말했다. 옛 동독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 가스부족에 더 취약한 건 아니다. 하지만 배급제 가능성은 이 지역에 대한 잠재적 투자자를 위축시킬 수 있다.

정치 역시 문제다. 옛 동독 지역, 특히 작센주에선 극우조직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강세다. 이 지역 기업 경영진들은 새로 들어설 공장들이 외국인 인재를 구하지 못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홀테묄러 부서장은 "해외 인재들에게 의존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개방적 태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며 "하지만 옛 동독지역의 외곽은 외국인혐오증이 거세다"라고 지적했다.

향후 독일 동부지역의 인구는 줄어들 전망이다. 서부지역보다 감소세가 더 빠르다. 당연히 해외 노동력에 의존해야 한다. 최근 독일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인구감소가 가장 극심할 것으로 예상되는 독일의 100개 지구 가운데 55개가 옛 동독지역에 있다.

그 보고서는 "향후 15년이면 옛 동독지역 경제활동인구의 42%가 은퇴한다. 이는 국가 평균보다 훨씬 높다"며 "노동시장은 물론 기업의 숙련노동자 확보, 연금제도, 보건의료제도 등에 상당한 악영향을 미친다. 2032년이면 경제활동인구 2명당 1명의 연금수급자를 부양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홀테묄러 부서장은 "옛 동독지역 인구가 계속 줄고 있다"며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도 사람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라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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