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허진회 교수의 경이로운 생명공학
굶주림과 질병 극복 이끈 종자 개량
인류 문명의 발달은 농업과 궤를 같이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약 10만년 전 고대 인류는 들판에 존재하는 곡류의 낱알을 채집해 섭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만여년 전부터 인류는 이러한 식물들을 심어 재배했으며 양과 같은 가축도 사육하기 시작했다. 이후 인구가 늘고 마을 형태의 터전을 구축·정착하며 점차 큰 규모의 농경 사회를 형성했다.
농경의 본격화로 사람들은 보다 이용 가치가 높은 식물을 선택해 재배했고 유용한 개체의 종자는 보관했다가 이듬해 다시 파종하는 초보적인 작물 개량도 시도했을 것으로 보인다. 품종 개량과 작물 재배 기술의 발전, 저장·가공 기술의 발달, 안정적인 생산을 위한 환경 관리 등은 농업의 발전을 이끌어왔다.
종자 개량 '녹색 혁명' 일으키다
사람이 섭취하는 칼로리의 약 50%는 벼 밀 보리 옥수수 콩 등의 종자에서 비롯된다. 이를 사료로 사용해 기른 가축의 육류 섭취까지 고려하면 인간 에너지원의 약 70%가 종자와 관련 있다. 20세기 인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식량의 안정적인 공급이 필수적이었다. 이를 위해 2차 세계대전 이후 화학비료 농약 그리고 관수시설과 농기계의 사용이 급증했으며 무엇보다도 밀과 벼 등 주요 식량 작물의 다수확 품종들이 개발, 공급됐다.
미국의 농학자인 노먼 볼로그(Norman Borlaug)는 멕시코에서 병해에 강하고 키가 작은 난쟁이(dwarf) 밀 품종을 개발했으며 이는 단위 면적당 밀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렸다. 이후 파키스탄과 인도에서는 1960년대 후반 밀 생산량이 두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는 국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에 '녹색혁명'으로 널리 알려진다. 이후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녹색혁명의 수혜로 기아와 배고픔에서 해방됐으며 볼로그는 식량 증산으로 세계 식량난 해결에 기여한 공로로 197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우리나라도 주식인 쌀이 턱없이 모자라 배를 곯던 시절이 그리 먼 얘기가 아니다. 허문회 서울대 농과대학 교수는 열대 지역에서 재배되는 인디카(indica) 품종과 일본 등 온대 지역에서 주로 재배되는 자포니카(japonica) 품종을 교배해 생산량을 높인 벼 품종을 개발했다. '통일벼'다. 이는 전국의 농가에 보급·재배됐으며 그 결과 1976년 우리나라는 역사상 최초로 쌀을 자급자족했다.
앞에서 언급한 난쟁이 밀 품종은 Rht 유전자의 변이에서 기인한다. 식물에서 생산되는 호르몬인 지베렐린은 식물 줄기의 신장을 촉진해 키를 크게 만든다. 밀의 줄기가 과도하게 자라면 곡식이 영글어 수확 시기가 다가올 때 이삭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쓰러지게 한다. 반면 난쟁이 밀은 지베렐린의 반응에 관여하는 Rht 유전자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줄기가 지나치게 자라는 것을 억제한 대신 튼튼한 줄기를 형성하고 보다 많은 수확량을 확보할 수 있다. 현재 많이 재배되는 다수확 벼 품종 역시 지베렐린 합성을 억제하는 유전자 변이를 포함하고 있다.
이처럼 주요 작물에서 수확량을 비롯한 주요 농업 형질과 연관된 유전 현상을 이해하고 해당 유전자의 기능이 밝혀짐에 따라 경험과 직관에 의존하던 기존 품종 육성(혹은 육종)이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우수한 특성을 갖춘 품종 개발은 다양한 교배 조합과 여러 단계의 선발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단점이 존재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 중 하나는 유전자 변형 GMO 작물 개발일 것이다.
쌀을 주식으로 삼는 아시아, 아프리카 일부 국가에서는 비타민A 결핍에 의한 시력 감퇴, 면역력 감소와 유아 사망률 증가 등의 문제로 인해 매년 수십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부 연구진은 벼에서 비타민A의 전구물질인 베타카로틴을 생산할 수 있도록 유전자 변형을 시도했다. 이렇게 개발된 쌀은 노란색을 띠어 '황금쌀'로 불린다.
유전체 정보·AI 활용하는 농업
현재 대부분 작물의 유전체 정보가 해독됐다. 이를 기반으로 우수한 유전자가 집적된 신품종 개발이 진행 중이다. 유전자 가위를 이용한 작물 유전체 편집도 이루어지고 있다. 인공지능 기술이 접목된 예측형 품종 개발도 가시화되고 있다. 바야흐로 현대 농업은 생명공학과 IT를 기반으로 하는 기술 집약적, 지식 집약적 산업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국제 밀 가격이 급등하고 이는 많은 국가에 수급 불안정을 야기하고 있다. 식량 안보는 한 국가의 주권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새로운 품종을 개발·공급하는 종자 산업은 농업 생산의 근간이다. 반도체 산업과 마찬가지로 국가 경쟁력의 척도이기도 하다. 여전히 낮은 식량 자급률을 나타내는 국내의 현실을 고려할 때 종자 산업의 육성은 시급한 현안으로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IMF 직후 유수 종자 회사들이 글로벌 기업들에 흡수돼 추진 동력마저 잃어버린 실정이다. 세계 각국이 앞다투어 품종 개발에 사활을 건 상황에서 안타까움이 크다.
세계 인구 증가,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급격한 기후 변화는 전 인류가 맞닥뜨릴 위기를 예견한다. 이 위기 극복에는 농업이 중추적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미래 문제 해결을 위한 열쇠를 다시금 농업이 쥐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