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식의 유럽 톺아보기
삐걱거리는 영국 정치, 무엇이 잘못되었나
지난 7일 영국 지방선거에서 집권 노동당이 크게 패함으로써 키어 스타머 총리의 내각이 위기에 봉착했다. 집권한 지 2년도 되지 않았고 원칙적으로 2029년까지 지속할 수 있는 정권이지만 패배의 책임을 둘러싸고 내홍에 빠졌기 때문이다. 내각을 구성하는 각료 가운데 벌써 5명이 사임함으로써 스타머에 대한 불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집권 여당 노동당도 총리를 전격적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세력과 기존의 내각을 유지해야 한다는 세력으로 나뉘었다.
2026년 봄 영국 노동당 정부의 위기는 크게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역사적 재기의 고삐를 잡은 노동당이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릴 위험을 자초하는 중이다. 2024년 스타머의 노동당은 보수당 14년의 장기집권에 종지부를 찍는 역사적 승리를 거두었다. 게다가 전체 의석 650석 가운데 410석 이상을 차지하는 압도적 승리였다. 의석의 과반을 단독으로 훌쩍 뛰어넘는 안정적 통치의 기반을 확보한 셈이었다.
스타머정부가 성공적으로 임기를 마친다면 노동당도 장기집권의 길을 열 기회였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은 잠시였고 다양한 부정적 평가가 누적되면서 스타머정부에 대한 실망이 여론을 짓누르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가장 큰 요인은 역시 총리의 리더십에 대한 의문이다. 스타머는 국민에게 비전을 제시하면서 앞장서 나가는 리더가 아니라 방향을 잡지 못하거나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비쳤다.
최근 피터 맨델슨 사건은 스타머정부의 부정적 이미지를 강화했다. 스타머 정부는 출범하면서 주미대사로 피터 맨델슨 노동당 핵심 인물을 임명했는데, 미국의 미성년 성매매로 악명을 떨친 엡스타인과 맨델슨의 친분이 폭로되면서 사임하게 되었다. 문제는 스타머가 애초에 이런 인물을 노동당 핵심이라는 이유로 대외적으로 중요한 주미 대사에 임명했다는 것이었다.
구조적인 정책에서도 스타머정부는 국민이 실감할 수 있는 변화를 만들어 내는 데 실패했다. 절대 과반의 의석수에도 불구하고 역동적인 정책 변화의 모멘텀을 살리지 못했고 일상과 관련된 재정위기 보건 주택 교통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부족한 미온적인 개혁안으로 일관했다. 보수당에서 노동당으로 역사적 정권교체가 이뤄졌으나 체감할 수 있는 변화는 없다는 국민의 불만이 쌓여 지방선거 패배를 불러온 것이다.
유럽 중도좌파의 역사적 쇠퇴
둘째, 스타머정부의 위기는 영국 노동당을 넘어 유럽 중도좌파의 역사적 쇠퇴를 반영한다. 20여 년 전 21세기가 시작할 즈음 영국의 토니 블레어와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사회주의와 시장경제의 타협을 주장하며 유럽 사회 민주주의의 혁신을 이끌고 있었다. 영국 독일 등 유럽 주요 강대국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중도좌파가 이끄는 정부가 무려 2/3에 달했던 시절이다. 프랑스도 2002년까지는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 내각이 집권했으니 말이다.
2026년 현재 중도좌파가 주도하는 정부는 유럽연합 27개국 가운데 스페인 덴마크 몰타 3개국뿐이다. 몰타는 워낙 작은 국가라 유럽 정치 판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덴마크의 경우 메테 프리데릭센 총리가 사민당이기는 하지만 이민정책에서는 ‘극우스러운’ 강경한 노선으로 독특한 중도좌파로 통한다.
유럽 전체에서 사민주의 계열 중도좌파가 주도하는 나라는 결국 스페인과 영국인데공교롭게도 둘 다 지방선거에서 대패하는 5월이 되었다. 스페인은 17일 인구가 가장 많은 안달루시아 지역에서 선거가 치러졌고, 페드로 산체스 총리의 사회노동당(PSOE)이 역사적 패배를 경험했다. 영국의 노동당은 2029년까지 의회 임기가 남았으나 스페인은 내년에 총선이 예정된 만큼 유럽 대륙의 중도좌파가 주요국에서 전멸에 가까운 상태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유럽에서 사민주의의 쇠퇴가 자연스럽다는 시각도 있다. 유럽 국가들은 복지국가를 통해 사회주의 목표를 대부분 달성했고 국민 대다수와 정치세력 대다수가 이를 지지하기에 유럽은 이미 사민주의의 임무를 완수한 셈이다. 국민의 기본권을 확고하게 뿌리내리는 데 성공한 자유주의가 정치세력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양상과 비슷하다.
하지만 유럽은 복지국가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세계화로 인한 불평등의 사회문제는 여전히 심각하다. 무엇보다 극우 극좌 양측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포퓰리즘이 사회적 불만과 불평등, 그리고 이에 대한 반발을 잘 반영하고 있다. 국제적 부호들과 친하게 어울리는 노동당의 맨델슨이나 러시아 석유회사에 취직한 독일 사민당 출신의 슈뢰더는 유럽 중도좌파가 얼마나 민중을 대변하는 본분은 잊고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치파편화라는 현대 민주주의 위기 반영
셋째, 노동당 정부의 위기는 정치 파편화라고 하는 영국과 현대 민주주의의 맹점을 드러내고 있다. 21세기 들어 시민의 불만을 흡수하는 다양한 정당이 등장하고 정치 리더십은 변덕스러운 단기적 여론의 직격타를 맞을 가능성이 커졌다.
역사적으로 유럽의 정당이란 계급적 기반에 바탕을 둔 구조적 세력이었다. 정당과 계급 사이에는 장기적 신뢰와 독점적 지지 관계가 존재했다. 그러나 현대 민주주의에서 유권자와 정당의 관계는 훨씬 변동성이 강하다. 정부와 국민의 상호관계가 단기적 여론에 크게 좌우되면서 매우 불안정해지고 취약해지는 특징이 강화되고 있다.
이에 더해 정치인들도 국익이나 공공 이익보다는 정당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개인적 성공과 출세를 위해 정치를 도구화하는 경향이 심해졌다. 특히 영국처럼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에서 총리는 항상 의원 집단의 변덕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고 대중적 인기에 따라 운명이 좌우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2010년부터 2024년까지 보수당 집권기 영국은 모두 5명의 총리가 재임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테리사 메이, 보리스 존슨, 리즈 트러스, 리시 수낙 등인데 그 가운데 3년 이상 재임한 경우는 캐머런뿐이다. 영국은 브렉시트라는 ‘메가톤급’ 정치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특수한 상황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유럽 대륙에서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프랑스에서는 2022년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재선한 이후 무려 5명의 총리가 역임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의 두 민주국가 영국과 프랑스가 모두 정치 불안정의 위기를 겪는 셈이다. 독일도 2021년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퇴임한 이후 올라프 숄츠와 프리드리히 메르츠 두 총리만 역임해 비교적 안정적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안정적 다수를 확보하지 못해 3당 합작의 ‘신호등 정권’을 구성하거나 좌우 합작의 기민·사민 정권을 만들어야 했다.
보수당 이어 노동당도 정치불안 반복될 듯
영국 키어 스타머 정부의 곤욕은 결국 영국 노동당의 위기이자 유럽 중도좌파 침체의 반영이며, 현대 민주주의에서 쉽게 드러나는 정치 파편화의 결과다. 노동당은 현직 총리와 당 지도자를 갈아치우는 일이 보수당보다 제도적으로 더 어렵다. 그러나 노동당 내 반발이 워낙 강력해 스타머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 솔솔 흘러나온다.
현재 영국 노동당에서 스타머에 대한 가장 유력하고 강력한 도전자는 맨체스터 시장인 앤디 버넘이다. 원외인물인 버넘을 의원으로 만들어 총리 도전이 가능하도록 조시 사이먼스라는 하원의원이 지난 18일 사임했고 다음달쯤 보궐선거가 치러질 예정이다. 노동당 당권 투쟁을 위해 의원이 마구 사임하면서 보궐선거를 유도하니 유권자를 얼마나 우습게 보는지 증명하는 행태다.
문제는 해당 선거구에서 최근 극우가 50%가 넘는 득표율을 보이면서 선전했기에 노동당 버넘이 당선되리라는 보장도 없다는 점이다.
브렉시트 이후 패션쇼를 방불케 했던 보수당의 총리 행진에 이어 노동당의 정치 불안이 반복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