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식 '가상자산 투자' 범죄 표적

2023-04-28 11:21:02 게재

불투명한 상장 기준, 피해 방치 제도가 문제 … 2018~2022년 피해액만 5조3000억원 달해

'고수익 보장'을 미끼로 한 가상자산(코인) 관련 사기가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불투명한 가상자산 상장 기준과 피해자가 속출하는데도 사실상 방치한 법과 제도를 그 배경으로 꼽는다.

28일 경찰 등에 따르면 최근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벌어진 납치·살인 사건은 가상자산 투자와 관련됐다. 사건의 주범과 교사범은 물론 피해자도 과거 가상자산 투자와 관련한 형사 사건에 함께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 사건뿐 아니라 가상자산을 고리로 한 사기 등 각종 범죄와 사건·사고가 이어지고 있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가상자산 관련 불법행위 검거 건수는 2019년(103건, 검거 인원 289명), 2020년(333건, 560명), 2021년(235건, 862명), 2022년(108건, 285명) 등 매년 100~300건 이상을 기록한다. 또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가상자산 사기 피해액은 5조2941억원에 달했다. 가격 급락으로 시장이 침체됐던 지난해에도 1조192억원의 피해가 발생했다. 지난 5년간 가상자산 사기로 검거된 인원은 2135명에 이른다.

지난 11일 오후 빗썸고객센터 전광판에 가상화폐의 실시간 거래 가격이 표시되고 있다. 연합뉴스 김인철 기자


◆국내 유통 가상자산 62%, 단독 상장 = 전문가들은 가상자산 관련 범죄 증가의 주요 원인으로 불투명한 상장 기준을 가장 먼저 꼽는다.

금융위원회 산하 금융정보분석원(FIU)의 '2022년 하반기 가상자산사업자 실태조사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사업자 간 중복지원을 제외한 국내 유통 가상자산 종류는 625종이다. 이중 국내 특정 사업자에서만 거래 지원되는 소위 '나홀로 상장'으로 불리는 단독상장 가상자산은 389종이다.

단독상장 가상자산의 경우 다른 거래소에서는 사업성·안정성을 인정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업성 있는 가상자산이라면 다른 거래소들도 상장을 검토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 거래소에서만 거래를 지원하고 거래량도 적은 가상자산이라면 투자 전 한 번쯤 의심해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하반기 국내 거래소에서 상장폐지 조치된 가상자산 68종(중복 제외) 중 48종이 국내 거래소에 단독 상장된 경우다.

FIU 보고서도 "국내 특정 사업자에서만 거래가 지원되는 단독 상장 가상자산의 34%는 시총 1억원 이하의 소규모로 급격한 가격 변동과 유동성 부족 등 시장 위험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상장 과정에서 뒷돈을 받은 혐의로 가상자산 거래소 전직 임직원과 상장 브로커가 구속되면서 단독 상장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거래소들이 구체적인 상장 절차와 과정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투자자들의 불안을 키운다.

검찰 관계자는 "특정 코인 상장 무렵에 (거래소 직원이) 수수했던 금품이나 코인 등에 대가성이 있다고 판단했다"며 "코인 업계 관련자들은 '코인시장에는 시세조작 작업이 만연해 있다'고 일관되게 진술했다"고 말했다.

◆피해자 속출에도 15년간 방치 = 또한 가상자산이 유통된 지난 15년동안 피해가 계속됐음에도 관련 규제나 규정이 없다는 점도 범죄 증가의 또 다른 배경으로 지목된다.

국회 등에 따르면 가상자산의 발행과 유통, 이용자 보호 등 관련 사안을 전반적으로 다룰 디지털자산 기본법에 대한 논의는 2년째 미뤄지고 있다. 현재 국회에는 가상자산 관련 법안이 18건 가량 발의돼 계류돼 있다.

다행히 국회 정무위원회가 지난 25일 법안소위에서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가상자산법)'을 의결했다. 법안은 가상자산사업자의 이용자 자산 보호를 의무화하고, 가상자산에 대한 불공정거래가 발생할 경우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최근 가상자산 투자와 관련한 각종 사건과 사고로 법안 마련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주요 쟁점들에 대한 여야 합의가 이뤄진 것이라 입법 과정에 관심이 쏠린다. 특히 가상자산 상장·발행 등 시장 질서 규제를 보완하는 추가 입법을 통해 시장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시세조작 후 매도해 수익 챙겨 = 전문가들에 따르면 가상자산 관련 범죄의 대표적 유형은 발행사 의뢰를 받은 리딩방 등 다단계업자가 투자자를 모집하는 사기다. 리딩방 담당자는 소수 초기 투자자들만 싸게 살 수 있는 '프라이빗 세일'이라며 매수를 설득한다. 이렇게 판매된 가상자산에는 일정 기간의 록업(매도 제한)이 설정된다.

투자금을 확보한 발행사는 브로커를 통해 가상자산을 거래소에 상장한다. 상장되면 시세 조작, 소위 MM(Market Making)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들은 목표 가격에 오를 때까지 자전거래를 반복한 후 매도해 돈을 챙긴다. 투자자들은 보유한 코인이 거래할 수 없는 록업 상태라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서울 강남구 납치·살인 사건의 발단이 된 'P코인(퓨리에버 코인)'도 대표적 사례다.

P코인의 발행사와 다단계업자들은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에 특별 물량을 판매(프라이빗 세일)하는 것처럼 속여 투자자들을 모집했다. P코인은 2020년 11월 13일 국내 한 가상자산 거래소에 단독상장됐다. 이 과정에서 브로커가 거래소 임직원에게 상장을 대가로 뒷돈을 줬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상장 뒤 1만354원까지 올랐던 코인 가격은 반년 만에 100원 미만까지 추락해 '시세조종'을 의심받는다. 가상자산 시장은 자전거래 규제가 없어 특정세력이 사고팔아 가격을 올린 뒤 고점에서 매도하고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하곤 한다. 납치·살인 사건 배후로 지목된 피의자들과 피해 여성 모두 이 과정에 깊숙이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사기 유형은 '스테이킹(Staking·예치)' 상품으로 포장된 다단계식 사기다. 코인 업체는 은행 예·적금처럼 코인을 예치하면 매일 이자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한다. 한발 더 나아가 투자자를 모아오면 배당금이 늘어난다고 유인한다.

초기엔 약속한 이자가 꼬박꼬박 지급된다. 이쯤되면 상당수 피해자는 지인들을 참여시켜 별도 수당도을 받는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이자 지급은 끊기고, 급기야 해당 코인이 상장폐지 되면서 원금마저 날린다.

경찰 관계자는 "가상자산 투자권유 과정에서 '원금보장' '고수익 보장' 등 투자자를 현혹하는 문구를 사용하는 경우 사기일 가능성이 높다"며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다.

◆존재하지 않는 코인 '판매한다' 유혹 = 최근에는 불법 유사수신업체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유사수신은 인허가나 등록·신고하지 않은 업체가 일반인에게 '고수익 보장'을 약정하고 출자금을 유지하는 불법행위를 말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자산을 내세워 다단계로 투자자를 모집한 뒤 투자금을 가로채는 방식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1월부터 3월까지 가상자산 투자 빙자 유사수신 관련 피해상담·신고 건수는 59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47.5% 증가했다. 불법 유사수신업체들은 특정 가상자산에 투자하면 상장 후 막대한 고수익을 올릴 수 있다며 투자자를 유혹한다. 특히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국내 대기업 총수가 투자한 코인이라는 '가짜 정보'를 앞세워 일대일 대화방으로 유인하는 사례도 드러났다.

'모 그룹 회장이 투자한 코인이며 1000%의 수익률을 보장한다'는 허위 광고는 수십만회 이상 조회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실제로 피해자 B씨는 대기업이 투자한 코인이며 원금과 고수익을 보장한다는 업체 유혹에 빠져 1000만원을 입금했다. 하지만 돈이 입급되자 해당 업체와 연락이 끊겼다.

이들 불법 업체는 유튜브 등을 통해 자금을 어느 정도 모집하면 해당 채널을 폐쇄한다. 이후 다른 채널을 열어 또 다른 피해자를 물색하는 수법을 쓴다.

자금이 부족한 투자자에겐 '레버리지 투자'라는 명목으로 제2금융권 대출을 받으라고 요구해 더 큰 돈을 뜯어가기도 했다.

최근 가상자산 투자 관련 불법 업체들의 수법이 점차 지능화·정교화되고 있다. 허위의 코인 지갑 사이트를 만들어 투자금이 입금되기 전 가상자산이 선입금된 것처럼 조작하거나, 명함과 사원증을 위조해 해외 가상자산거래소 소속 임직원인 것처럼 행세하거나, 국내 대기업 직원이라고 하면서 해당 대기업과 발행사가 투자 협약을 맺은 것처럼 속이기도 한다.

금감원은 "최근 비트코인 등 주요 가상자산 가격이 상승하면서 이를 악용하는 불법 유사수신업체들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므로 금융 소비자의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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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풍 기자 sp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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