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 예외주의 흔들, 지정학 각축장 전환

2025-02-10 13:00:04 게재

경제·군사적 가치 점차 커지자 강대국들 군침 … 미국 뒤처진 선박기술 확보에 사활

냉전 종식 이후 오랫동안 ‘북극 예외주의(Arctic exceptionalism)’라는 불문율이 있었다. 북극은 전세계 많은 지정학적 문제에 대해 일정한 면책을 부여받았다.

이젠 달라졌다.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빠르게 녹아 새로운 해로가 개통되고 석유와 가스, 주요 광물에 대한 접근이 쉬워짐에 따라 지정학 각축장으로 변했다. 미국 러시아 중국 등 많은 국가들이 북극에서 이해관계를 극대화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칼럼니스트 라나 포루하는 8일(현지시각) “북극 조감도로 지구를 보면 러시아가 얼마나 큰지, 온난화되는 세상에서 그린란드가 지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왜 미국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북극의 광대한 지형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는지 금방 알 수 있다”고 썼다.

새로운 항로에다 풍부한 희토류

북극의 온난화 속도는 지구 전체 평균보다 4배 빠르다. 매년 오스트리아 크기의 빙하가 사라진다. 1980년대 이후 얼음의 양은 70% 이상 감소했다. 북극에 빙하가 없는 첫 날이 2030년 이전에 올 수도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지난달 23일 “온난화는 북극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줄 전망”이라며 “글로벌 무역과 에너지, 지정학 셈법을 뒤집을 수 있다”고 전했다.

이런 전망은 전세계 각국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은 지난해 12월 5만8000톤에 달하는 극지용 화물선을 공개했다. 세계 최대 규모다. 최근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북극에 위치한 덴마크령 그린란드를 사겠다며 이를 위해서는 군사적 수단을 쓸 수도 있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캐나다를 상대로는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는 게 어떻냐는 제안을 던지기도 했다.

예상되는 가장 큰 변화는 새로운 운송경로다. 녹아내린 얼음은 3가지 길을 열어줄 수 있다. 첫번째는 북극해항로(NSR)로, 러시아 해안을 따라 바렌츠해와 베링해를 연결한다. 두번째는 북서항로(NWP)로, 캐나다와 알래스카 등 북아메리카 북극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다. 마지막은 북극을 가로지르는 북극횡단항로(TSR)다. 3가지 경로 모두 아시아와 북미, 유럽 간 이동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또 파나마 운하와 수에즈 운하 등 정체지점을 피할 수 있다.

언제 실현될 수 있는지는 경로에 따라 다르다. 북서항로는 좁고 구불구불한 수로로 구성돼 있다. 또 북극해항로보다 얼음 녹는 속도가 느리다. 1500㎞에 달하지만 심해항구는 하나뿐이고 비상시설도 부족하다. 수심이 얕아 선박의 크기가 제한된다. 캐나다는 북서항로가 자국 영해에 있다고 주장하지만, 미국과 유럽은 국제 해협이라고 반박한다.

북극횡단항로엔 이같은 문제가 없다. 훨씬 더 깊은 중앙 북극해를 횡단한다. 영해를 피하기 때문에 정치적 긴장도가 낮다. 그리고 북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가는 가장 짧은 항로를 제공한다. 전문가들은 이 항로를 통해 북아메리카와 아시아를 오가는 선박이 연간 수천척에 달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하지만 얼음이 녹더라도 곳곳이 빙산으로 뒤덮여 쇄빙선으로만 항해할 수 있을 전망이다. 수천척 선박이 항해하려면 2050년대까지 기다려야 할 수 있다.

따라서 북극해항로가 가장 유망한 선택지다. 이 항로는 2005년부터 거의 매년 여름 쇄빙선이 항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일부 구간은 쇄빙선의 호위를 받으면 1년 내내 항해가 가능하지만 비용이 많이 든다. 그럼에도 통행량은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북극해항로를 항해한 선박은 92척으로 2016년 19척에서 크게 늘었다. 이 항로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일부 선박을 유인할 수 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과 중국 상하이 거리를 기존 항로 대비 5000㎞(25%) 단축하고, 여행기간을 30일에서 14일로 줄일 수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경제학자 에디 베커스는 “이 항로로 아시아-유럽연합 간 전체 교역이 6% 증가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온난화로 북극이 입는 또 다른 혜택은 자원이다. 대게와 알래스카 킹연어 등 일부 어종은 따뜻해진 물에서 점차 줄어들고 있지만, 대서양 대구 같은 남부·온대 수역의 어종이 바렌츠해와 베링해로 이동하고 있다. 영양이 풍부해진 바닷물은 개체 수 증가에 도움이 된다. 빙하가 녹으면 새로운 땅이 열리고 어업시즌이 길어진다. 고등어가 그린란드 연안에 도착하기 시작한 것은 2011년이었다. 2014년 고등어는 그린란드 총수출의 23%를 차지했다.

북극이 원자재의 보고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세계 미개발 석유의 13%, 천연가스의 30%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보다 높은 가치를 인정 받는 건 ‘녹색’ 광물이다. 전기차 배터리의 중요한 성분인 코발트 흑연 리튬 니켈, 태양광전지판과 풍력터빈에 사용되는 아연, 전기제품에 필요한 구리, 그리고 많은 희토류가 북극에 있다. 티타늄과 텅스텐, 바나듐 등 ‘초합금’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금속도 많다. 그린란드엔 미국정부가 중요하다고 간주하는 50가지 광물 중 43가지가 매장돼 있다. 알려진 희토류 매장량은 4200만톤으로, 2023년 전세계 채굴량의 약 120배에 달한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최근 역사에서 북극은 주둔군, 스파이장치, 핵무기 배치 장소로서의 매력을 발산했다. 하지만 이제는 현대판 엘도라도(도시 전체가 금으로 도배됐다는 전설의 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향후 수십년 북극은 경제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미국, 25년 동안 쇄빙선 못 만들어

극지방의 얼음이 줄어든다는 것은 희토류 광물, 석유, 천연가스의 막대한 매장량이 있는 해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가 그 자원을 차지하고 개발할 것인가를 두고 미국과 러시아, 중국 및 기타 국가들 간 경쟁은 수년 전부터 시작됐다. 이는 또 북극이 점점 군사 및 첩보 활동의 영역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극이 지구상에서 가장 경쟁이 치열한 지역 중 하나로 급부상하고 있지만 미국의 준비는 다소 늦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표적으로 미국은 지난 25년 동안 새로운 쇄빙선을 건조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건조할 능력이 없는 상황이다. FT는 “해안선이 약 16만㎞에 달하고 인구의 40%가 해안가에 살고 있는 미국이 더 이상 적시에 또는 비용효율적인 방식으로 자체 선박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라고 전했다.

쇠퇴의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1980년대 상업용 선박 건조 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이 중단된 것이 큰 이유라는 분석이다. 자유시장경제를 지지하는 동시에 안보강경론을 내세운 레이건정부는 냉전시대 군사비 지출이 미국 선박건조 산업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수요를 창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잘못된 판단이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냉전이 끝나면서 이미 쇠퇴하고 있던 선박건조 산업은 더욱 황폐해졌다. 군용과 상업용 선박건조 사이의 연계가 끊어지고 이 산업이 외주화되면서 심각한 결과가 초래됐다.

바이든정부 국가안보보좌관 제이크 설리반은 퇴임하기 전 “선박이 새로운 반도체칩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 산업전략의 초점이 돼야 한다는 의미다.

선박건조에 대한 절실함은 초당파적인 합의를 이끌어냈다. 바이든정부는 지난해 7월 핀란드·캐나다와 함께 쇄빙선을 공동생산하는 ‘ICE Pact’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향후 10년 동안 핀란드의 선박 엔지니어링 전문기술을 도입할 계획이다. 또 지난해 12월엔 미국 조선업계를 지원하는 ‘미국 조선업강화법’이 초당적인 지지를 받아 도입됐다. 이 법은 현재 트럼프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인 마이크 왈츠가 하원의원 시절 공동발의했다.

왈츠는 FT 인터뷰에서 “대통령은 미국 해양산업 기반의 경제적, 국가 안보적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며 “상업용 해양산업을 활성화하고 미국의 쇄빙능력에 추가적으로 투자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김은광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