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리즘 미술은 르네상스 미술의 창조적 일탈

2025-02-28 13:00:02 게재

정광균정광균의 80일간 유럽미술관 산책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모던미술과 명작 이야기 (4)

필자는 지난해 여름 ‘나홀로 자유여행’으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80일간의 유럽미술 여행’을 다녀왔다. 이에 유럽 12개국의 주요 미술관과 거장들의 개별미술관 순례 경험을 독자들과 공유하면서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모던 미술과 명작 이야기’를 미술사적 인문학적 견지에서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그 시작은 부활이며 재생의 의미인 르네상스의 아방가르드(선구적) 역할을 한 르네상스 미술을 창조적 혁신의 관점에서 풀어보았으며, 이어 피렌체에서 꽃피운 르네상스 초기 미술과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천재 미술가와 거장들이 주도한 전성기 미술을 인간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미술사가 E.H. 곰브리치는 ‘The Story of Art’ 서두에서 “미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라는 화두를 던졌다. 이는 미술은 미술가의 창조물이기에 미술사는 곧 미술가의 인물사로 보는 관점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르네상스 3대 거장과 같은 엘리트 미술가들이 미술사를 만들어 간다는 영웅주의적 미술 사관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시대환경의 변화는 역사 문화 사회적 맥락에서 미술에 영향을 미치기에 재해석이 요구된다. 필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르네상스의 후기미술과 매너리즘 미술에 대해 살펴본다.

매너리즘 미술은 북유럽의 르네상스 후기미술과 동시대에 나타난 과도기적 미술 양식이었다. 그러한 경향성은 이미 르네상스 전성기의 3대 거장 중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후기작품에도 나타났지만 1527년 신성로마제국의 로마 약탈 이후 유럽 사회가 불안정해지면서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북유럽 등을 포함하여 범유럽적으로 유행했다. 한편 이 시기는 절대왕정의 태동기라서 바로크적 양식도 혼재했으나 16세기 말까지는 매너리즘 미술이 지배적이었다.

매너리즘은 이탈리아어로 스타일, 또는 양식을 뜻하는 마니에라(maniera)에서 유래됐다. 흔히 상투적 모방이나 타성에 빠진 습관적 반복 또는 진부한 기교처럼 창조성이 없을 때 쓰는 부정적인 말이지만 매너리즘 미술은 하나의 창조적인 미술 양식이었다. 원근법 명암법 해부학 등의 과학적 접근방법을 계승하면서도 균형 비례 조화라는 르네상스 미술의 규범에서 일탈했기에 18세기 후반에는 그리스·로마미술의 이상미를 재해석한 신고전주의 미술의 등장으로 저평가되기도 했다. 그러나 매너리즘 미술은 고전미술의 규범을 거부하고 변형을 추구하면서 시대의 변화에 앞서가는 아방가르드적 시도를 함으로써 20세기 들어서는 새로운 미술 사조로 재평가됐다.

르네상스 후기의 정치 사회적 혼란과 휴머니즘 위기 속에서 탄생

매너리즘 미술의 배경과 특징은 어떠한가? 르네상스 전성기 미술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천재 미술가들의 사망과 함께 정점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 로마 약탈 이후의 사회적 혼란과 유럽의 세력 판도 변화는 르네상스 미술에 대한 저항과 균열을 가져왔는데 매너리즘 미술은 그 과정에서 나타났다. 그렇다, 이는 곰브리치의 영웅주의적 미술 사관으로는 해석하기 어려운 거시환경 요인의 작용이었다. 이제 조화 안정 균형을 추구하는 르네상스 미술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사회현실에는 맞지 않았다. 따라서 르네상스 미술의 규범에서 벗어나 실험적이고 감각적이며 개성적인 표현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 특징은 감상 포인트가 된다.

첫째, 인체의 왜곡이다. 우아하지만 긴 목과 긴 손가락 비현실적이지만 세련된 인체의 곡선미 등은 신비스럽다. 둘째, 원근법의 기묘한 변형과 인위적인 과장이다. 얼굴은 왜곡돼 커지고 손은 가까워서 크게 보이며 인체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셋째, 복잡한 구도와 강렬한 명암대비다. 안정적인 구도를 깨고 빛의 연출을 극대화한다. 이처럼 매너리즘 미술은 르네상스 후기의 정치 사회적 혼란과 휴머니즘의 위기 속에서 새로운 미술을 추구함으로써 동시대 화가이며 미술사가였던 조르조 바사리는 ‘마니에라 모데르나(Maniera Moderna, 모던한 양식)’로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르네상스 후기에 범유럽적으로 유행

필자는 지난해 여름 12개국 90여개의 유럽미술관을 돌아보면서 매너리즘 미술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매너리즘 미술은 범유럽적으로 유행했기 때문에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 런던의 내셔널갤러리 등 이곳저곳에 분산되어 있었다. 둘러본 결과 매너리즘 미술은 르네상스 미술에서 보여주는 조화와 통일성은 없었다. 하지만 독특한 스타일로 그린 그림들은 오히려 개성미가 있었다. 이는 매너리즘 건축도 마찬가지였다. 피렌체의 우피치 궁, 로마의 산피에트로대성당,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도서관 등은 르네상스 건축양식을 모방하면서도 기둥을 추가하거나 기둥 간격을 불균형적으로 변형하는 등의 인공미를 더해 세련미가 있었다.

모나리자도 이탈리아가 아닌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듯이 매너리즘 미술을 포함 르네상스 미술품은 이탈리아의 우피치 미술관과 바티칸 미술관을 제외하고는 런던의 내셔널갤러리가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3대 거장과 보티첼리, 티치아노, 틴토레토, 루벤스, 엘그레코, 얀 반 에이크, 뒤러, 홀바인 등의 명작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는 18~19세기에 영국 왕실 귀족 부호들이 불법 반출된 미술품을 수집하거나 그랜드 투어 등을 통해 대량 매입하고 1824년 영국 정부가 내셔널갤러리를 설립해 이들이 기부한 미술품을 체계적으로 보존 관리해 왔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의 국공립미술관들은 무료이니 영국으로 미술 여행을 간다면 내셔널갤러리에서 르네상스 걸작들을 마음껏 감상해 보길 권한다.

극적인 구도, 인체의 왜곡, 강렬한 명암대비

틴토레토의 최후의만찬(그림1)

매너리즘을 대표하는 미술가는 파르미자니노 폰토르모 브론치노 엘그레코 등이다. 하지만 매너리즘 징후는 이미 르네상스 전성기 후반에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 나오는 젊은 예수의 근육질 몸매, 라파엘로의 ‘그리스도의 변용’에 나오는 젊은 예수 예언자와 사도들을 분리한 상하 구도와 역동적인 모습에서 나타났다. 다른 한 예는 베네치아의 산조르조마조레 성당에 있는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그림 1)이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그림 2)과 비교하면 좌우대칭의 일직선 구도가 아닌 대각선 구도이며, 예수는 중앙에서 외곽으로 이동하고, 예수 중심의 삼각형 구도는 와해됐으며 예수의 후광과 빛과 어둠의 극적 대비는 매너리즘 특성이다.

다빈치의 최후의만찬(그림2)

계절의 순환이 ‘여름 끝 가을 시작’이 아니라 ‘여름 속 가을 시작’이듯이 르네상스 미술 - 매너리즘 미술 - 바로크 미술로의 전환도 중첩되면서 이어졌다.

매너리즘 전성기 거장들의 명작들은 어떠한가? 우선 어려서부터 미술 신동이었으며 이탈리아의 피렌체 로마 볼로냐 등지에서 활약한 파르미자니노다. 그의 대표작은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목이 긴 성모’(그림 3)다. 비현실적으로 긴 성모마리아의 목, 섬세하지만 긴 손가락, 우아하면서 아름다운 곡선미, 부드러운 채색과 신비로운 표정, 왼쪽 천사의 긴 다리, 오른쪽 예언자의 크기 등은 원근법을 벗어난 인위적인 왜곡이며 과장이다. 하지만 그림은 더 세련되고 신비스럽다. 그는 이렇게 르네상스의 균형, 비례, 조화의 이상미를 뛰어넘어 실험적이며 감각적인 그림을 구현함으로써 매너리즘 회화를 정점에 올려놓았다.

목이 긴 성모(그림 3)

다음은 그리스의 크레타섬 출신으로 초기에는 비잔틴 미술가로 활동하였으나 베네치아로 건너가 티치아노와 틴토레토로부터 그림을 배운 후 스페인에 르네상스와 매너리즘 미술을 보급한 화가 겸 조각가인 엘그레코다. 그가 남긴 매너리즘 미술의 걸작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만찬과 함께 세계 3대 성화로 불리는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다.

톨레도의 산토 토메 성당에 있는 이 작품은 세로 5m 크기의 대작으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그림은 구름을 경계로 지상과 천상으로 나누어 지상은 평소 가난한 이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많은 재산을,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쓴 오르가스 지역의 백작인 곤잘로 루이스의 매장을 그리고 천상은 그의 영혼을 천사들이 품고 하늘로 올라가서 하느님 품에서 다시 태어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지상과 천상의 세계를 대비시키는 구도, 비례를 왜곡한 늘씬한 신체, 외부의 빛이 아닌 신비로운 조명에 의한 명암의 대비, 차가운색이지만 깊이 있는 채색 등은 매너리즘의 특징이다.

엘그레코가 톨레도에서 활동할 때는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다. 종교개혁의 발상지인 북유럽과 영국 등지에서는 전통적인 종교화가 점차 사라지고 있었으나 스페인의 톨레도는 가톨릭의 총본산이었기에 그의 그림은 종교화가 많았다. 그렇지만 신 중심이 아닌 인간의 내면과 영성을 표현한 그림이었다.

르네상스 미술과 바로크 미술 사이의 교량

매너리즘의 의미는 부정적이나 매너리즘 미술의 양식사적 의미는 긍정적이다. 독일의 미술사가 하인리히 뵐플린은 르네상스 미술과 바로크 미술 사이의 간주곡이라고 평가했으며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매너리즘 미술이 새로움을 창조했다고 평가했다. 그렇다. 당시에는 3대 거장 등 천재 미술가들의 후광으로 빛을 보지 못했으나 후대의 미술사가들에 의해 재평가된 것이다. 여기서 몇 가지 시사점을 발견한다.

첫째, 매너리즘 미술은 르네상스 미술의 창조적 일탈로 미술의 기본인 형과 색의 파괴 왜곡 해체 등을 시도함으로써 새로운 미술로 나아가는 문을 열었다. 둘째, 동시대에 나타난 북유럽의 르네상스 후기미술(전편 게재)과 범유럽적 매너리즘 미술을 비교하면 전자는 르네상스 미술의 ‘모방 속의 재현’이고 후자는 ‘모방 속의 왜곡’이었다. 셋째, 시대의 전환과 함께 균형 비례 조화의 미학인 르네상스 미술의 규범은 도전받게 되었으며 매너리즘 미술 속의 비현실적 표현은 19세기 후반의 표현주의 상징주의 미술과 20세기 초현실주의 미술에 영향을 미쳤다.

이제 매너리즘 미술은 르네상스 미술의 종언을 고하면서 17, 18세기의 역동적이며 화려한 바로크, 로코코 미술을 예고하고 있었다.

정광균 전 주이집트 대사 관광학박사 문화예술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