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전쟁이후 흔들리는 호르무즈…떠오르는 알래스카
“미국 석유 사든가 직접 쟁취하라”는 트럼프 경고
알래스카산 원유, 운송기간 단축되고 성질맞아 주목
중동전쟁 이후 세계 에너지패권이 미국으로 기울어져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31일 읽어 내려간 대국민연설 내용을 보면 분위기가 어느 정도 짐작된다.
그는 중동산 원유를 도입하는 국가들을 향해 “미국에서 석유를 사라. 미국은 세계 1위의 석유·가스 생산국이다. 미국은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석유를 거의 수입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석유를 받는 세계 각국은 그 통로를 스스로 관리해야 한다. 해협을 장악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트럼프 대통령 발언은 단순한 외교적 도발이 아니라 현재 글로벌 원유시장 구조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 발언의 전제는 명확하다. 미국은 더 이상 중동산 원유에 생존을 거는 나라가 아니라, 자국산 원유를 외부에 공급할 수 있는 수출국이며, 중동 리스크의 부담을 동맹과 수입국에 전가시키는 신호로 해석된다.
◆최대 산유국 미국, 유럽·아시아로 원유 수출 = 실제로 미국은 셰일혁명 이후 세계 최대 수준의 산유국으로 부상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미국의 원유 수출은 2024년 일평균 410만배럴을 넘어 사상 최고를 기록했고, 2025년에는 전년보다 3% 줄었지만 여전히 일평균 400만배럴 수준을 유지했다. 수출 대상은 유럽과 아시아·오세아니아가 양대 축이며, 2024년에는 유럽으로의 수출이 일평균 193만배럴에 이르렀다.
국가별로는 네덜란드가 미국산 원유를 가장 많이 사들였으며, 일평균 규모가 2024년 79만배럴에서 2025년 88만4000배럴로 늘었다. 네덜란드는 로테르담 항을 중심으로 미국산 원유가 유럽 전역으로 재분배되는 허브로 기능하며, 사실상 ‘유럽 전체 수요의 관문’ 역할을 한다. 유럽은 러시아산 원유 축소 이후 미국산 경질유를 대체 공급원으로 활용해왔다.
아시아에서도 미국산 원유의 존재감은 커졌다. EIA는 “2024년 대아시아 수출은 중국 감소에도 한국·싱가포르·인도 증가가 이를 일부 상쇄했다”고 밝혔다.
즉 미국 원유는 특정 국가 한 곳에 고정적으로 파는 구조가 아니라 가격과 정제 수요에 따라 유럽과 아시아 사이를 오가는 유연한 성격이 강하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2024년 미국으로부터 1억7000만배럴의 원유를 수입했다. 사우디아라비아(3억3000만배럴)에 이어 2위 수입국이다. 미국산 원유 수입비중은 2022년 13.2%에서 2023년 14.2%, 2024년 16.4%로 매년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미국 ‘경질유 수출·중질유 수입’ 이중구조 = 하지만 미국은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 부상했음에도 여전히 원유를 수입하는 ‘이중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겉으로는 자급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생산과 정제의 불일치가 시장 흐름을 결정짓고 있다.
미국은 퍼미안 분지, 바켄, 이글포드 등에서 경질유 생산을 많이 한다. 반면 정유공장은 중질유 처리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 결과 미국은 경질유를 해외로 수출하고, 중질유를 해외에서 수입하는 흐름이 고착화됐다.
미국의 정유공장은 과거부터 중질유를 처리하도록 고도화된 설비를 갖춰왔다. 코커(coker)와 탈황설비 등 복잡한 공정을 통해 품질이 낮은 중질유를 고부가 제품으로 전환하는 데 최적화돼 있다. 반면 경질유는 단순 증류만으로도 휘발유와 나프타를 쉽게 생산할 수 있어 처리 과정이 비교적 단순하다.
이 같은 구조는 수익 전략으로 이어진다. 중질유는 황 함량이 높고 점도가 커 가격이 낮게 형성되는 반면 경질유는 품질이 좋아 상대적으로 비싸다. 미국 정유업계는 값싼 중질유를 수입해 고도 정제 과정을 거쳐 휘발유·경유 등으로 판매함으로써 정제마진을 극대화한다.
즉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구조가 형성돼 있는 것이다. 정유시설이 중질유 위주로 설계돼 있는 점은 우리나라로 유사하다.
정유업계에 따르면 석유제품 생산 측면에서도 중질유의 활용은 필수적이다. 경질유만 사용할 경우 휘발유 비중이 과도하게 늘어나고, 디젤과 항공유 생산은 줄어드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실제 시장에서는 디젤과 항공유 수요가 상당히 크기 때문에, 중질유를 혼합해 제품 구성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정유사가 단순히 원유를 처리하는 수준을 넘어, 수요에 맞는 제품 포트폴리오를 설계하는 산업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런 미국의 생산·수출 구조는 국제유가의 가격 형성에도 깊게 반영된다. 중동 공급 차질이 장기화하면 아시아 기준유인 두바이유의 변동성이 브렌트와 WTI보다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
◆국내 도입기간, 알래스카 15일·중동 25일 = 또 중동발 지정학 리스크로 호르무즈 해협 항행 불안이 장기화조짐을 보이면서 글로벌 원유시장의 시선이 쏠리는 곳 중 하나가 미국 알래스카다.
중동산 원유 의존도가 높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대체 공급원을 모색하는 가운데, 알래스카산 원유(ANS)가 현실적인 대안으로 급부상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동아시아는 중동 원유 의존도가 높아 호르무즈 해협 봉쇄 시 직접적인 타격이 불가피하다. 실제로 한국과 일본 대만 태국 싱가포르 등 주요 수입국들은 불안정한 해협 상황 속에서 새로운 수급선 확보가 절실한 상황이다.
알래스카산 원유가 주목받는 이유는 ‘거리’와 ‘성질’이다. 알래스카 발데즈 항을 출발한 유조선은 한국 여수까지 약 12~15일이면 도착한다. 중동산 원유가 호르무즈해협을 거쳐 한국까지 오는데 소요되는 기간이 20~25일 임을 고려하면 열흘정도 단축된다. 지정학적 위기 시 매우 빠른 공급망 대응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또 이는 미국 본토에서 출발해 수에즈운하~희망봉을 경유해 39~41일 소요되는 WTI 수송기간 대비 압도적으로 짧은 수준이다. ANS는 높은 개발비에도 운송비 절감 효과까지 고려하면 최종 도입 가격은 WTI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것으로 평가된다.
정유 적합성도 이점이다. ANS는 경질유와 중질유의 중간유이지만 황 함유량이 1% 내외로 중질 성향으로 분류된다. 중질유에 맞춰 설계된 한국 정유시설에서 활용하기가 경질유보다 낫다. 또 ANS를 도입하면 항공유와 경유를 많이 뽑을 수 있어 국내 제품시장 공급을 늘릴 수 있다.
이에 비해 경질유인 WTI는 일부 공정에서 비효율이 발생할 수 있어 활용하려면 구조개선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숨통 트이게 하는 대안” = 공급 측면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알래스카 노스슬로프 지역의 피카(Pikka) 프로젝트는 본격적인 원유 상업생산을 앞두고 있으며, 연내 하루 8만 배럴 수준까지 생산 확대가 예상된다. 여기에 대형 유전 개발 사업인 윌로우(Willow) 프로젝트의 생산 착수시점이 관심사다. 하루 18만 배럴 생산이 전망되는 이 사업은 현재 법적 분쟁에서 미국 정부가 우위를 확보하며 추진 동력이 강화된 상태다. 계획대로라면 2029년 첫 생산이 가능할 전망이다.
정용헌 전 아주대 교수는 “알래스카는 상당한 원유 천연가스 매장량을 지녔지만 중동산보다 경제성이 떨어져 외면 받아왔다”며 “하지만 중동의 공급안정성이 타격받음으로써 우리에게 중요한 정책적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의 에너지 설비 파괴 정도와 호르무즈의 상황을 고려하면 우리에게는 숨통을 트이게 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재호 기자 jhlee@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