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진단
시험대 오른 남북한 2국가관계론
2월 19일 서울중앙지법은 북한해상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귀순의사를 밝힌 북한선원 2명을 강제 북송한 사건에 대해 문재인정부 고위관료들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로 선고유예를 판결했다. 북한주민은 한국국민으로서 대한민국에 살 자유와 권리가 있는데 한국정부가 그들의 의사에 반해 북한으로 보냈다는 것이 유죄 취지다.
이번 사건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북한주민의 법적 지위’에 관한 법원의 판단이다. 법원 판결은 헌법 제2조에 따른 국적법과 제3조 영토조항으로 볼 때 ‘북한주민은 일반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에 포함된다’고 한 대법원 판례를 그 근거로 삼았다. 정부의 심사·승인을 얻기 전까지 북한주민은 잠재적 한국국민일 뿐이라는 변호인측 주장은 인용되지 않았다.
2국가관계론은 대한민국 헌법 위반
이는 북한을 반헌법단체로 보는 헌법 규정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최신의 판례다. 김정은 위원장이 “남조선 것들은 우리 공화국과 인민들을 수복해야 할 대한민국의 령토이고 국민이라고 꺼리낌없이 공언해대고있으며 실지 대한민국 헌법이라는데는 ‘대한민국의 령토는 조선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버젓이 명기되어 있다”며 남북관계를 ‘적대적 2국가관계’로 규정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남북한은 ‘전체로서의 한국(조선)’을 인정하면서도 상대를 미해방지역으로 규정해 왔다. 우리 헌법은 영토조항을 통해 북한지역을 대한민국 영토로 간주해 대한민국 주권이 북한지역에도 미치므로 북한정권이 반국가단체에 불과한 것으로 해석했다. 북한헌법도 제9조에서 북한지역을 공화국 북반부로 명시해 남한을 ‘전체로서의 공화국’의 미해방지역으로 간주했다.
국제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남북한은 고위급회담을 열고 ‘7.4공동성명’을 통해 ‘대화를 통한 통일’ 원칙에 합의하는 등 상대의 정치적 실체(국가가 아닌 정부)를 인정했고 ‘남북기본합의서’를 통해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잠정적 특수관계’라는 이중적 관계(국내적으론 국가 불인정, 국제적으론 국가지위 인정)에 합의했다. 하지만 남북한이 서로를 반국가단체, 해방대상으로 보아왔기 때문에 불안정한 법적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
우리 측만 보아도 헌법 규정 때문에 ‘남북기본합의서’가 법 규범력을 갖지 못했다. 당시 정부여당은 남북관계가 국가 간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헌법 위반의 소지가 있다며 '남북기본합의서'의 국회 비준·동의에 반대했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국회의 비준·동의가 없음을 근거로 이 합의서의 법적 구속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최근 북한은 남북 합의에 따른 모든 규정이 폐기 내지 백지화됐고 국제규범인 유엔헌장과 다자협약인 한반도 정전협정만 남은 현실을 들어 ‘적대적 2국가관계론’을 들고 나왔다. 2국가관계론은 우리 헌법의 영토조항에 대한 도전이자 남북이 합의했던 특수관계론에 대한 거부이지만 아직은 북한의 일방적인 선언일 뿐이다.
담론 변화: 통일과 평화, 연합론과 양국론
그렇다면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무엇인가? 일단 윤석열정부는 ‘자유의 북진’을 내세운 통일독트린을 발표해 이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하지만 민주진보진영 일부에서는 ‘평화적’임을 전제로 2국가론을 수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고, 벌써부터 북한을 ‘조선’으로 부르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한국전쟁이 이후 민주진보진영은 이념을 넘어선 민족, 분단을 극복하는 통일담론을 제기하며 보수진영과 차별화해 왔다. 그 뒤 김대중 대통령이 ‘사실상의 통일’을 내세우며 평화공존의 2국가관계를 잠정적으로 인정한 남북연합론을 제시하면서 민주진보진영에서는 점차 평화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특히 노무현정부 때부터 국정과제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내걸면서 평화의 제도화가 현실적인 정책과제로 떠올랐다.
체제경쟁에서 뒤처진 북한은 2016년 제7차 당대회 이후 핵·미사일 개발을 본격화해 2017년에는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한 뒤 이른바 ‘국가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전쟁 재발을 막고 한반도 평화를 추구하는 평화담론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지지를 받으면서 당위적 통일론은 더욱 설 자리를 잃었다.
이 과정에서 민주진보진영 내에서 양국론-연합론 논쟁이 일어났다. 연합론이 평화공존을 거쳐 남북연합을 수립해 ‘사실상의 통일’을 이룬 뒤 통일국가로 가야 한다고 본 데 비해, 양국론은 평화공존 자체를 목표로 보고 남북관계의 미래도 단일한 민족단일국가가 아니라 열려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민주진보진영 내부에서 당위적 통일론에서 평화공존론으로 전개되면서 2국가론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었다.
그런 가운데, 남북의 국력 격차가 확대되고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보수진영에서는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을 닮은 흡수통일 담론이 등장했다. 이명박정부의 3대 공동체통일구상과 통일항아리 운동, 박근혜정부의 통일대박론과 전국 단위의 통일준비위원회 조직, 그리고 자유의 북진을 내세운 윤석열정부의 8.15통일독트린이 대표적이다.
통일담론은 과거 민주진보진영이 주도했지만 이제는 보수진영이 주도하기 시작했고, 민주진보진영에서는 평화담론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민주진보인사 가운데는 평화담론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보수진영이 통일담론을 주도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보수진영의 통일담론이 흡수통일론으로 변질돼 평화를 해친다고 보기 때문이다.
조만간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 여부를 결정하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예정되어 있다. 대통령 파면이 인용될 경우엔 대선을 거쳐 새 정부가 출범하게 된다. 새 정부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변칙적인 통상·동맹 정책과 맨 먼저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새 정부는 원하던 원치 않던 북한의 적대적인 대남정책을 상대해야 한다.
평화를 우선하되 통일에도 대비해야
분단의 장기화와 체제경쟁의 피로감 때문인지 일반국민들의 여론도 점차 통일보다는 평화를 선호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신정부의 대북정책은 평화공존의 남북관계를 복원하는 데 초점을 둬야 할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동족 관점의 통일을 부인하며 2국가관계론(양국론)을 내세우고 있어 어떻게든 이 문제를 정리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일단 2국가관계론(양국론)은 현행 대한민국 헌법에 위반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남북한이 사실상 2개 주권국가이고 단기간에 통일을 이루기는 어렵다는 국제정치 현실도 외면하면 안 된다. 통일을 도외시한 채 제대로 평화를 논할 수 없지만, 평화 없는 통일 논의도 무의미하다.
여기서 당면한 적대관계를 제거해 가며 평화공존체제를 만들어 궁극적으로 통일을 이룬 동서독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동서독기본조약'에서 2개 독일국가가 합의됐음에도 불구하고 서독정부는 ‘전체로서의 독일’ ‘동독주민도 독일국민’의 2가지 원칙을 견지했다. 이러한 원칙을 인정해 서독헌법재판소가 합헌 판결을 내렸고 훗날 동서독 통일의 법적 토대가 됐다. 우리 헌법은 ‘북한주민도 한국국민’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지만 ‘전체로서의 한국’의 핵심 주제인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동일성’에 관해 학계는 아직 논쟁 중이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은 동일한 것이 아니지만 분리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북한이 주장하는 적대적 2국가관계를 수용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특수관계만 내세워 소모적인 체제경쟁을 계속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러한 법 현실을 고려해 사법부는 헌법 적용에서 전향적인 법해석을 내놓아야 한다. 새 정부도 통일 지향의 원칙은 견지하되 당면 정책으로 통일을 추진하지 않는다는 전략적 사고 위에서 대북정책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