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능력 줄고 일감은 쌓인 K-조선, 미국 주문 받을 수 있나
건조시설 2019년 1억1600만톤 → 2023년 1억1300만톤
한-미 조선협력 결과 미국 조선산업 부활만 도울 수도
미국이 한국 조선산업과 협력하고 싶다며 내미는 손은 우리 조선산업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을까.
바이든 행정부에서 추진한 반도체법(칩스법)에 따라 미국 현지 투자를 진행하다 약속한 보조금을 트럼프 행정부가 지불하지 않겠다며 입장을 바꾸자 진퇴양난에 빠진 반도체처럼 자칫 미국 조선산업만 키워주고 한국의 조선산업은 약해질 가능성은 없을까.
지난 4일(현지시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미 의회 연설에서 “우리는 상선과 군함 건조를 포함한 미국 조선산업을 부활시키겠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백악관에 새로운 조선 (담당) 사무국을 설치하고 이 산업을 원래 있어야 할 미국으로 가져오기 위해 특별 세제 혜택을 제공하겠다”며 “우리는 한때 아주 많은 선박을 만들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많이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곧 매우 빠르게 선박을 만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후 당선인 신분으로 윤석열 대통령과 통화하며 “미국 조선산업에 한국의 도움과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말 속에는 자국 조선산업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의지와 방향이 뚜렷하다. 한국은 이를 양국 조선산업이 함께 성장하는 기회로 만들 수 있을까.
◆미국에서 다가오는 기회 = 지난달 27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는 ‘미국 해양·조선업 시장 및 정책동향을 통해 본 우리 기업 진출 기회’라는 보고서에서 미국의 정책 수요에 기반한 한·미 해양산업 협력 확대가 국내 기업에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우선 미 해군이 연간 10조원 규모의 함정 유지·보수·정비(MRO) 예산을 집행하고 있지만 미국 안에는 조선소가 부족하고, 낡은 설비로 생산성이 떨어져 전함 유지 보수 정비를 제대로 못하고 있어 한화오션 HD현대중공업 등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해외에서 건조할 수 없게 한 자국 법률을 정비하면 해군과 해안경비대 선박도 건조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으로 진출하는 현지화 전략도 가능하고,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면서 생기는 틈새를 공략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중국에서 건조한 선박에 불이익을 주는 미국 정책은 글로벌 선사들이 중국에 발주할 수 없게 하고 한국 조선산업이 대신 수주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국 조선업을 되살리고 △1500억달러 규모의 글로벌 해운산업에서 중국 지배력을 줄이며 △중국의 해군력 강화를 견제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행정명령이 주목받고 있다.
로이터가 5일(현지시간) 입수한 행정명령 초안에 따르면, 이 계획은 총 18개 항목으로 구성돼 있다.
행정명령에는 △중국에서 만든 선박으로 운송하는 수입품에 부과하는 수수료를 활용해 조선업 지원 △전용 기금으로 활용될 해양안보신탁기금 신설 △조선업 발전을 위한 세금공제, 보조금 및 대출지원 등의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트럼프는 중국의 해양굴기에 대응해 미국의 해운·조선산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미 의회 신해양전략을 주도한 공화당 의원 마이크 왈츠와 마크 루비오를 각각 백악관 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에 발탁해 그린란드 매입, 파나마운하 반환 등을 밀어붙이고 있다.
왈츠 보좌관은 지난해 12월 민주당 상원의원 마크 켈리와 함께 ‘미국을 위한 선박법’을 발의하기도 했다. 선박법은 △미국의 해운을 재건하고 △미국의 전략물자 등 화물의 안전한 운송을 확보하고 △조선업을 부활하며 △조선소 근로자와 해운 해기사를 양성하고 △중국의 해운·조선업을 제약하는 내용을 담았다.
법안에 따르면 미국은 미국에서 건조해 미국에 등록하고(미국 국적) 미국 선원이 승선하는 ‘전략 상선대’를 10년 안에 250척으로 확대하게 했다. 현재는 80척이다.
미국의 조선산업이 무너져 미국 안에서 선박을 다 건조하기 어려운 현실을 감안해 외국에서 건조한 선박(임시선박)도 전략상선대에 추가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추후 미국에서 건조한 선박으로 교체할 것을 약정해야 한다.
법안은 의회 회기가 지나면서 폐기됐지만 선박법 내용을 계승한 새로운 법안들이 2월 초 잇따라 발의됐다.
트럼프 행정부도 직접 중국의 해운·조선을 압박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달 21일 중국 해운기업 소속 선박과 중국에서 건조한 선박이 미국 항구에 입항할 때 각각 최대 100만달러, 150만달러씩 입항료를 내는 방안을 제시했다. USTR의 제안은 오는 24일 공청회 등을 거쳐 확정될 예정이다. 그대로 확정되면 미국을 오가는 수출입 화주들은 중국 선사를 피하고 선사와 선주들은 중국 조선소에 선박 발주를 꺼리게 될 수 있다.
◆한국의 대응능력과 떨칠 수 없는 우려 = 미국에서 새로운 수요가 생길 수 있다는 기대가 커지고 있지만 조선업계는 아직 신중한 모습이다.
한국수출입은행이 올해 1월 발표한 ‘해운·조선업 2024년 동향 및 2025년 전망’ 보고서와 산업은행이 최근 발표한 ‘조선산업의 경쟁력 강화 방안’에 따르면 한국의 조선산업은 선박을 공급할 수 있는 건조시설 규모가 2019년 1억1600만CGT(표준선환산톤)에서 2023년 1억1300만톤으로 줄었다. 미국이 선박을 발주해도 건조할 수 있는 여력이 부족하다.
2010년대 극심한 불황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국내 조선기업들은 최근 수주량이 늘었지만 다시 올 수 있는 침체기를 의식해 도크 등 선박을 건조할 시설을 확대하는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 대신 생산설비를 자동화·지능화하는 디지털전환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한국은 설비투자를 확대하지 않고 있지만 중국은 적극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그 결과 중국은 세계 선박시장에서 수주점유율이 2015년 32.3%에서 지난해 70.6%까지 올랐고 한국은 같은 기간 26.1%에서 16.7%로 줄었다. 한국이 수주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경고음도 나온 상태다.
건조시설은 늘어나지 않았지만 주문은 밀려 평균 3년치 이상 일할 수 있는 물량을 수주한 상태다. 미국에서 주문이 들어와도 쉽게 받기 어려운 상황이다.
HD현대그룹의 조선지주사 HD한국조선해양은 2월 말 기준 3~4년치 일감을, 한화오션은 지난해 말 기준 3년치 물량을, 삼성중공업도 3년치 이상 일감을 확보했다.
조선산업 관계자는 “미국에서 새로운 수요가 발생한다고 해도 우리가 그것을 수용할 수 있을지 아직 말하기 어렵다”며 “지금 설비와 인력구조에서 얼마나 수용할 수 있을지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건조설비보다 생산인력은 더 큰 문제로 지적된다. 이은창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생산규모를 키워야 한다면 조선소들은 플로팅도크 등을 통해 시설을 확보할 수도 있지만 최근 수주를 받고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것은 설비문제보다 인력문제였다”며 “한-미 조선협력에서도 중요한 문제는 인력"이라고 지적했다.
이 연구위원은 “미국발 수요에 대응해 어느 정도 인력을 키우고 미리 준비할지 사회적 논의가 시급히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정연근 기자 ygju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