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섬백길 걷기여행 20 마라도 둘레길
국토 최남단 마라도 ‘애기업개’ 신화
울릉도와 흑산도 마라도는 동서남해에 서로 아득히 떨어져 있는 섬들이다. 옛날에는 도무지 교류하기 어려운 머나먼 거리였다. 그런데도 세 섬에는 너무도 흡사한 서사를 가진 신화가 전해진다. 울릉도 성하신당의 동남동녀, 흑산도 진리당의 피리부는 소년, 마라도의 애기업개 신화가 그것이다.
어른들이 자신들만 살기 위해 아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이야기, 모두 섬의 수호신 탄생 신화다. 법으로 인신공양이 금지된 뒤에도 암암리에 인신 공양이 행해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들이다. 어른들은 모두 법망을 피하기 위해 간계를 부려 아이들을 제물로 삼았다.
국토 최남단의 섬. 제주의 마라도 둘레길은 백섬백길 60코스다. 2.3㎞, 섬의 해안 둘레를 따라 길이 나 있다. 좌우 어느 쪽으로든 섬을 한 바퀴 순환할 수 있다. 내내 경사가 없는 평이한 길이라 느긋하게 걸어도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걷는 동안 단 한순간도 바다가 눈에서 사라지지 않는 아름다운 길. 그 길 한 모퉁이에 마라도의 신전, 애기업개당이 있다.

옛날 모슬포 사는 이씨 여인이 버려진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여인은 관청에 신고했으나 부모를 찾지 못했고 아이는 여인에게 맡겨졌다. 아이가 없던 여인은 딸처럼 길렀다.
아이가 여덟 살 되던 해 여인은 아이를 낳았다. 주어다 기른 아이는 애기를 업어 기르는 애기업개가 되었다. 그 무렵 마라도는 사람의 거주가 금지된 금섬이었다. 섬 주변에 해산물이 넘쳐나도 물살이 거세 좀처럼 들어갈 수도 없었다.
하지만 매년 봄 망종 때부터 보름간은 물살이 없어 입도가 허가됐다. 어느 봄, 모슬포 사람들이 테우(뗏목)를 타고 마라도로 들어갔다. 테우 주인인 이씨 부부는 딸 아이와 열세살이 된 애기업개를 함께 데리고 갔다. 사람들은 지천으로 널린 해산물을 손쉽게 건져 올렸다. 식량이 다 떨어질 즈음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런데 테우가 섬을 벗어나려 하자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었다. 떠날 것을 포기하고 섬으로 돌아오니 바람은 잠잠해졌다. 그러다 다시 떠나려면 또 바람이 거세지기를 반복했다. 그 사이 잡아놓은 해산물까지 다 먹고 없어졌다. 물과 양식이 바닥나 버린 날 저녁 사람들은 내일은 기어코 떠나자고 결정했다.
다음 날 아침, 가장 연장자가 꿈 이야기를 했다. “어젯밤 꿈에 해신이 나타나 애기업개를 두고 가지 않으면 모두 물에 빠져 죽는다”고 했단다. 테우의 주인 이씨 부인 또한 같은 꿈을 꾸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해신의 제물로 애기업개를 바치기로 결정했다. 이씨 부인은 섬의 나뭇가지에 기저귀 하나를 걸어놓았다. 테우에 사람들이 오르자 다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이씨 부인은 애기업개에게 기저귀를 걷어오라고 시켰다. 애기업개가 기저귀를 가지러 간 사이 바람이 자고 테우는 떠나버렸다. 애기업개는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테우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뒤 3년 동안 사람들은 죄책감으로 마라도에 가지 못했다. 3년 후 모슬포 사람들이 다시 마라도에 들어갔을 때 애기업개는 하얀 뼈로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뼈를 거두어 묻었다.
후일 거주가 허락돼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을 무렵 한 노인의 꿈에 자꾸 애기업개가 나타났다. 섬사람들은 애기업개가 죽은 자리에 당을 만들고 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애기업개당은 처녀당, 할망당이라고도 한다. 커보지도, 늙어보지도 못하고 죽은 아이가 처녀가 되고 할머니가 되고 수호신이 되었다.
가장 비천하게 살다 참혹하게 죽은 어린아이가 마침내 신이 됐으니 이는 기쁜 일인가 비통한 일인가.
백섬백길: https://100seom.com
공동기획: 섬연구소·내일신문
강제윤 사단법인 섬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