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여성 필즈상 수상한 이란 미르자하니
여성의 수학·과학 공부에 편견없는 이란의 학문 풍토…그의 생일 ‘세계 여성 수학자의 날’ 지정
미국과 이란 전쟁이 한창이던 지난달, 필자는 쉴 새 없이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었다. 한강을 따라 달리다가 중랑천으로 빠졌다. 반기마다 외국어 말하기 시험을 보러 동대문구 이문동에 있는 대학으로 간다. 진급에 필요한 점수를 땄지만 대학 캠퍼스가 주는 설렘과 자극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시험에 응시한다. 하천을 빠져나와 도심으로 합류할 시간이다. 자전거를 끌고 오르막길을 걷는데 머리에 스카프를 두른 여성이 앞에 있다. 이란 거주 5년 구력이 남았는지 스카프 색깔과 뒷모습만 보고도 이란에서 온 사람임을 직감한다. 그의 이름은 ‘자흐라’로 서울 어느 공과대학 교수로 일하는 남편과 함께 한국에 왔다고 했다.
이란 수학 환경에서 성장한 ‘미르자하니’
우연찮게 겪은 이 일로 오랫동안 잊고 있던 세계적인 이란인 여성이 떠올랐다. 그는 2014년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을 수상한 마리암 미르자하니(Maryam Mirzakhani)다. 1936년 제정된 필즈상 역사에서 여성이 상을 받기까지 78년이 걸렸다. 최초의 여성 수상자가 바로 미르자하니다. 서울에서 열린 시상식 당시 그는 스탠퍼드 대학 교수였다. 하지만 박사 과정을 밟으러 미국에 오기 전까지 그는 철저히 이란 수학 교육 환경에서 성장했다.
2008년 미국 클레이 수학연구소가 주목받는 학자였던 미르자하니를 인터뷰한다. 미르자하니는 이란과 미국의 수학 교육을 비교해달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한다. “이란 교육 시스템은 미국인들이 상상하는 것과 다릅니다. 하버드 대학원생 시절, 이란에서 여성이 대학에 다닐 수 있다는 점을 자주 설명해야 했습니다. 고등학교까지 남녀가 분리된 학교에 다니지만 그렇다고 올림피아드나 여름 캠프 같은 혼성 활동이 금지되지는 않습니다.”
1994년 홍콩에서 열린 제35회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IMO)가 이를 보여준다. 이란은 여학생 2명, 남학생 4명이 팀을 이뤄 출전했다. 17세 소녀 미르자하니는 42점 만점에 41점을 기록하며 금메달을 땄다. 이란 여성 최초의 기록이다. 이듬해인 1995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개최된 대회에서는 42점 만점을 기록하며 2회 연속 금메달을 획득했다.
미르자하니가 세계적 수학자로 부상한 이야기는 1977년 5월 12일 이란 테헤란에서 시작된다. 전기 엔지니어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는 어릴 적부터 수학적 개념에 친숙했고 분석적 사고와 문제해결력을 키울 수 있었다. 미르자하니는 성장하며 1979년 이슬람 혁명과 이후 8년간 이어진 이란-이라크 전쟁을 통과해야 했다. 그럼에도 이란에는 수학·과학 분야를 높이 사는 문화가 존재했다. 특히 수도 테헤란은 지적 전통이 있었고 교육 열의가 강한 도시였다.
‘파르자네간’과 현대 이란의 수학 문화
미르자하니의 수학적 재능은 테헤란 영재 고등학교 ‘파르자네간(Farzanegan)’에서 싹을 틔운다. 파르자네간은 이란에서 가장 재능 있는 학생들을 발굴하고 육성하기 위해 설립된 학교로 정부 지원을 받는 국립 영재교육 기관이다. 남녀가 분리된 환경이었으나 파르자네간은 여성 영재 학생들이 학문적 숨통을 틀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미르자하니가 재학 중 여성 교장선생님이 중추적 역할을 했다. 미르자하니와 단짝 친구가 남학교에서만 진행되던 심화 수학 수업을 듣고 싶어 하자 즉각 조치를 취해 교육이 이뤄졌다. 파르자네간은 일반 학교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교과 과정을 바탕으로 전문 지도를 제공했고 지적 호기심과 세계적 야망을 추구하는 문화를 적극 장려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이란에 뿌리내린 수학적 전통을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란의 수학 역사는 중세 이슬람 황금기부터 미르자하니가 활동한 현대까지 천 년이 넘는다. 페르시아 학자 알콰리즈미(Al-Khwarizmi)는 대수학을 별도 수학 학문으로 확립했다. 시인으로도 알려진 오마르 하이얌은 원뿔 곡선의 교차점을 이용해 3차 방정식을 푸는 등 대수학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이란은 1980년대부터 수학 올림피아드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수학 영재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현대 이란 수학 문화는 크게 네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문제 해결이다. 정형화된 기술의 적용보다 창의적 접근이 필요한 도전 과제에 중점을 둔다. 둘째는 협업과 공동체다. 올림피아드 프로그램을 통해 재능 있는 학생들이 서로 도전하고 영감을 주는 공동체를 형성했다. 다음은 제도적 활용이다. 국립 영재교육 기관과 올림피아드 대회에 기반해 재능 있는 학생을 조기에 발견하고 있다. 마지막은 사회적 가치다. 이란 사회는 수학자, 공학자, 엔지니어를 높이 산다. 수학적 성취는 이란 문화에서 크게 인정받는다.
이란 과학기술을 대표하는 ‘샤리프 공대’
미르자하니가 학부로 선택한 샤리프 공과대학(Sharif University of Technology)은 이란 과학기술 교육의 정점이다. 학부생 시절 미르자하니는 연구 논문 세 편을 발표했다. 이는 세계 어느 대학에서든 매우 드문 일이다. ‘슈어 정리의 간단한 증명’은 미국 수학계에서 주목할 정도였다. 에바드 마흐무디안 교수, 시아바시 샤샤하니 교수는 학부생 미르자하니를 연구 파트너로 삼았다. 샤리프 공대는 독립적 사고를 하고 잠재력이 있는 인재를 일찍부터 알아보고 세계적 수학자가 되도록 길을 터주었다.
학부 시절 미르자하니는 비극적 사건을 겪는다. 1998년 늦겨울에 발생한 버스 사고였다. 이란 남부 아바즈(Ahvaz)에서 열린 경시대회를 마치고 돌아오던 샤리프 공대 수학 영재들이 탄 버스가 계곡으로 추락했다. 이 사고로 학생 7명이 사망했다. 미르자하니는 몇 안 되는 생존자였다. 영재 동료를 잃은 트라우마 속에서도 학업을 계속해 하버드 박사 과정에 진학한 사실은 그가 비범한 정신력과 결단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미르자하니의 성공을 그의 비범함과 더불어 이란 수학 문화라는 맥락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란은 수학적 문제 해결과 경쟁을 통한 발전을 중시하며 수학을 고독한 작업이 아닌 협력으로 본다. 또한 여성이 수학·과학을 공부하는 것에 대해 편견이 없다. 이러한 존중은 국제무대에서 활약하는 여성 수학자를 다수 배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례로 미르자하니의 파르자네간 단짝 친구이자 1994년 올림피아드에서 은메달을 딴 로야 베헤슈티 역시 샤리프 공대에 진학한 다음 MIT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워싱턴대 수학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이 미국에서 수학적 탁월함을 꽃피우기 전에 이란에서 받은 교육, 교사의 헌신, 공동체의 협력이 탄탄한 기초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란 교육지표는 예상과 달라
2026년 2월 갤럽 조사에서 미국인이 가장 ‘안 좋아하는(mostly unfavorable)’ 국가는 이란이었다. 이란은 호감도 13%를 기록하며 북한과 함께 꼴찌를 차지했다. 미국과 이란 전쟁이 장기화되며 이란이 미국을 이해하는 만큼 미국이 이란을 이해하고 있을까 의문이 생겼다. 이란에서 5년, 미국에서 3년을 거주하며 양국과 친숙하다고 자부하는 필자는 2007년 토머스 프리드먼이 쓴 뉴욕타임스 중동 칼럼이 떠올랐다.
그는 글에서 “이란 여성은 투표를 하고 공직에 진출하며 대학생 다수를 차지하고 노동 인력에 통합되어 있다”고 썼다. 20여 년 후 지금은 어떨까. 2025년 6월 발표된 UN 보고서를 보자. 2025년 이란 대입시험 1차 모집기간에는 96만명이 등록했다. 이중 여성이 61만명으로 63%를 차지했다. 필자가 기업가정신을 공부한 테헤란대학교는 여성 합격자 수가 남성 합격자 수를 추월했다. 이란 과학, 기술, 공학, 수학(STEM) 분야 졸업생의 70%는 여성이다.
마리암 미르자하니는 서울에서 필즈상을 받은 지 3년 만에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40세였다. 살아있을 당시 미르자하니의 시각은 이란과 미국을 넘어 세계를 향해 있었다. 그는 수상 수감으로 “앞으로 더 많은 여성이 상을 받는 날이 올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8년 후 우크라이나 여성 수학자가 두 번째로 필즈상을 받는다. 2018년 세계여성수학자회의는 미르자하니가 태어난 5월 12일을 ‘세계 여성 수학자의 날’로 지정했다. 곧 세계 여성 수학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