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연장 사실상 반대…한은은 왜 논쟁적 현안에 진심인가
장기 저성장 국면서 노동개혁 절박성 잇단 보고서 발표
“데이터에 기초해 방향제시, 건전한 논쟁해 보자는 취지”
노동절을 앞두고 정치권이 노동계 표심잡기에 나섰다. 조기대선 국면에서 노동자 지지를 확보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최근 정치권과 노동계 주된 쟁점은 정년연장과 주4일 근무제 도입 등이다. 자칫 표를 얻기 위한 대중영합적 정책이 남발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는 상황에서 한국은행이 노동 현안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어 주목된다.
한은은 이달 초 정기적으로 발행하는 ‘BOK이슈노트: 초고령사회와 고령층 계속근로 방안’이라는 보고서를 내놨다.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정년연장 등의 현안을 담았다.
보고서는 특히 2016년 근로자 정년이 60세로 의무화되면서 노동시장의 두드러진 변화를 여러 통계에 기초해 추산했다.
주요 내용은 정년을 연장해 법적으로 의무화하면서 고령층 근로자 1명이 늘어나면, 청년층 근로자는 0.4~1.5명, 평균 1명 정도 감소한다는 내용이다. 보고서는 “임금체계 조정없이 시행된 정년연장은 고령층 고용을 증가시키는 효과가 있었다”면서도 “그 혜택은 유노조·대기업 일자리에 집중됐고, 청년고용 위축과 조기퇴직 증가 등의 부작용을 초래했다”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다만 고령층 고용이 경제 전반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봤다. 저출산·고령화가 심화하는 상황에서 65세 이상 고령자의 노동시장 잔류가 연평균 0.1%p 정도의 추가적인 경제성장률로 이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한은은 그러면서 단순히 법적으로 정년을 연장하는 것보다 일본과 같이 다양한 방식으로 계속 근로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아울러 지금과 같은 경직적인 연공서열식 임금체계도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번 보고서 작성 배경에는 이창용 총재의 의중도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노동 및 교육문제 등에 대한 개혁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해 온 이 총재는 조기대선 국면에서 이 문제가 쟁점이 될 것으로 보고 과학적인 접근법에 기초한 대안 제시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은 한 고위 간부는 “한은이 통화정책을 집행하는 데서 경제상황을 전반적으로 보는데 경기적 요인도 있지만 구조적 측면도 있다”면서 “총재가 장기구조적 개선 과제로 노동현안에 관심이 많고, 무엇보다 철저히 데이터에 근거해서 방향을 제시할 것을 강조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은은 2022년 이 총재 취임 이후 임금과 고용, 노동생산성 등과 관련한 다양한 정책보고서를 내놨다. 지난해 3월 발표한 ‘돌봄서비스 인력난 및 비용 부담 완화 방안’이 대표적이다. 한은은 당시 보고서를 통해 “외국인 돌봄서비스를 고용허가제 대상으로 하고, 최저임금 차등 적용을 통해 돌봄가구의 비용을 절감해야 한다”고 해 사회적 논란을 불러오기도 했다.
한은은 이밖에도 이 총재 취임 이후 △노동시장에서 사회적 능력의 중요성 증가(2024. 6) △근무여건 선호와 노동시장 변화 (2024. 4) △미혼인구 증가와 노동공급 장기 추세(2024. 1) △인공지능(AI)과 노동시장 변화(2023. 11) △주요국 노동수급 차이가 임금상승에 미치는 영향(2023. 4) 등 10여건 이상의 노동 관련 보고서를 발표했다.
노동관련 현안에 대한 이러한 한은의 적극적인 입장 개진에 대해 노동계는 물론 고용노동부 등 정부부처에서도 곱지 않은 시선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용노동부 한 고위관계자는 “돌봄 노동자 최저임금 적용 제외 등은 법적으로 현실적으로 여러 문제를 낳을 수 있다”면서 “다른 노동현안에 대해서도 한은이 사전에 충분한 공감없이 불쑥 발표하는 것은 불필요한 논란을 낳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한은은 관계부처와 충분한 협의 또는 설명을 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한은 고위 관계자는 “정부 관련 부서나 국회 등을 상대로 우리의 생각이나 입장을 충분히 전달하고 있다”면서 “장기 저성장 국면에서 노동개혁 과제 등은 중대한 현안이라는 인식아래 순수한 취지에서 건전한 논의를 해보자는 것”이라고 했다.
한편 한은은 다음달 중순 한국개발연구원(KDI)과 함께 고령화 사회를 주제로 공동 컨퍼런스를 개최한다. 고령화 사회를 맞아 우리사회가 직면한 당얀한 현안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기획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도 노동관련 현안이 거론될 것으로 전해졌다.
백만호 기자 hopebaik@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