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의대생 유급사태, 문제는 신뢰회복이다

2025-05-02 13:00:02 게재

4월 30일까지 의대생들이 수업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유급이 불가피해졌다. 이 사태는 정원 확대에 반발한 집단 수업 거부로만 바라보는 것은 현실 회피다. 이는 단지 정원 문제도 교육행정 문제도 아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고등교육의 공동체 구조, 신뢰 시스템의 총체적 붕괴를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다. 교육과 정치, 제도와 감정, 조직과 개인이 어긋난 결과가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정부와 대학은 “복귀율이 25%를 넘지 못했다”고 말한다. 반면 복귀 의향이 있는 학생은 60~70%에 이를 수 있다는 설문도 있다. 이 간극을 만드는 건 정치도 제도도 아니다. 바로 프레임이다. ‘복귀는 배신’, ‘정부는 곧 무너질 것’, ‘버티면 사면된다’. 이런 말들은 누군가의 선동이 아니라 일상 속 조그만 단톡방, 선배의 한마디, 학생회 커뮤니티 속 분위기로 축적되어 만들어진다. 이것은 정치의 언어로 포장된 감정의 정치다. 그리고 이 감정은 교육을 멈추게 하고 개인을 침묵하게 만든다.

‘복귀는 배신’이라는 프레임 강력하게 작동

이 프레임은 정당한 정치적 요구를 무력하게 만들고 구성원을 소모적으로 갈라치기 한다. 지금 의대생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정부의 강압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감정의 감시다. 이 사태의 출발은 윤석열정부가 충분한 사회적 논의 없이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일방적으로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그 뒤로 이어진 전공의 사직, 의대생의 집단 휴학, 그리고 정권 말기 백기투항에 가까운 증원 백지화까지, 이 일련의 과정은 정치의 실패였다. 특히 정부가 3058명 정원 동결을 발표한 시점에는 이미 ‘사실상 정책은 철회되었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받아들여졌지만 학생들의 집단행동은 끝나지 않았다.

왜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더 이상 정책이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문제는 신뢰였다. ‘다시는 믿지 않겠다’는 감정의 응집, ‘버티면 언젠가 보상받을 수 있다’는 정략적 기대감, ‘남들이 버티니 나도 버텨야 한다’는 생존의 논리가 얽히면서 교육 시스템은 마비됐다. 이것은 정치를 개인화시킨 결과이며 공동체 설계 실패의 반영이다. 공동체는 감정을 안전하게 해소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고 그 감정을 공식화해 주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 리더십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교육은 명백히 제도이지만 그 제도를 작동하게 하는 건 정서적 계약이다. 학생은 제도가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수업에 참여한다. 교수는 학생이 진정성 있게 노력할 것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채점이 가능하다. 행정은 학칙이 집단의 존속을 위한 합리적 규칙이라는 전제가 있어야만 권위를 가진다.

그러나 지금 이 정서적 계약은 무너졌다. 교육부는 ‘정책은 물러났으니 학생이 돌아오면 된다’고 말하고 학생은 ‘제도가 바뀌어도 신뢰는 남지 않았다’고 말한다. 제도는 있지만 신뢰는 없다. 명분은 있지만 설득은 없다.

정치의 본령은 사람 마음을 어루만지는데 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정치권은 부아를 돋구고 갈등을 부추기는데만 열심인 것 같다. 의료계를 움직이는 단체들은 의료개혁 전면 재논의를 주장하며 정치세력화를 노린다. 여야는 이 사태를 대선용 이슈로 삼는다. 의대생들은 그 사이에서 고립되고 교육은 정쟁의 인질이 되어버렸다.

지금 필요한 건 정책이 아니라 설득의 기술

의대 유급 사태를 해결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정책 결정이 아니라 프레임의 전환이다. 정부는 복귀생 보호 가이드라인을 발표하고 일부 대학은 복귀생 수강 우선권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복귀 학생에 대한 낙인행위를 경고하고 교수들이 공동체의 리더로 나서야 한다. 학생들 내부의 리더도 필요하다. 복귀를 원하는 학생은 다수이지만 입장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복귀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의 결단이며 그 개인의 결단이 존중받도록 배려해야 한다.

이 사태는 정권의 문제만도 아니고 의료계만의 문제도 아니다. 대한민국 고등교육 시스템이 위기 앞에서 얼마나 취약한지를 드러낸 사건이다. 모든 걸 정책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위에서의 통치 방식, 감정의 소용돌이를 공동체 안에서 소화하지 못하는 밑바닥의 구조, 그리고 정치가 개입하면 할수록 더욱 혼란스러워지는 사회적 갈등 해결능력 부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지금 필요한 것은 사면이 아니라 관계 회복이다.

정책적 승부가 아니라 관계적 설득이 필요하다. 복귀생과 비복귀생, 학생과 교수, 교육부와 대학, 정부와 의료계, 이 모든 관계가 다시 신뢰 위에서 재설계돼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의대 정원 확대보다 더 시급한 의료개혁이다.

김기수 정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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