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파 레오 14세, 분열된 교회 통합 이끌 ‘다리’ 될까
개혁과 전통 사이의 균형자 기대
교회 쇄신과 신뢰 회복 과제 산적
가톨릭 역사상 첫 미국인 교황 레오 14세의 선출은 2000년 역사의 가톨릭교회가 맞이한 새로운 전환점이다. 미국 시카고 출신이지만 페루에서 20년간 선교사로 활동한 ‘가장 미국적이지 않은 미국인’으로 평가받는 그의 등장은 세계 곳곳에서 분열과 갈등이 심화되는 이 시대에 화합과 조화를 향한 교회의 의지를 보여준다.

◆세계 교회의 중심축이 바뀌고 있다 = 레오 14세의 선출은 가톨릭교회 내 권력 지형도의 변화를 상징한다. 전통적으로 유럽 중심이었던 교황직이 2013년 아르헨티나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에 이어 미국-페루 이중국적자에게 이어진 것은 교회의 중심축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계 가톨릭 신자 13억명 중 42%가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에 살고 있으며 미국과 캐나다의 신자 수까지 합치면 전체 신자의 절반 가까이가 아메리카 대륙에 분포한다.
반면 전통적인 가톨릭 강국이었던 유럽의 신자 비율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교회가 현대 사회의 변화에 적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도 가톨릭 신자가 꾸준히 증가하는 점을 고려하면 세계 교회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교황의 출신 지역이 다양화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레오 14세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측근으로 개혁적 성향을 갖고 있으면서도 신학적으로는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는 균형자로 평가받는다.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 재위 11년 동안 심화된 교회 내 진보-보수 갈등을 치유할 적임자라는 평가로 이어진다.
페루 빈민가에서의 오랜 사목 경험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조해온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라는 기조를 이어갈 것임을 시사한다. 동시에 진홍색 모제타(어깨 망토)를 착용하고 첫 등장한 점은 전통적 가치에 대한 존중을 보여준다는 분석도 나온다.
교회 내 개혁을 둘러싼 대립은 프란치스코 교황 시기에 첨예화됐다. 성직자 독신제, 여성 서품, 성소수자에 대한 입장 등 다양한 이슈에서 진보와 보수 진영의 갈등이 불거졌다. 레오 14세는 이러한 분열을 봉합하고 “대화와 만남을 통해 하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다리”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레오 14세’라는 이름의 의미 = 새 교황이 선택한 ‘레오 14세’라는 교황명은 사회정의와 노동권을 강조했던 레오 13세(재위 1878-1903)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레오 13세는 회칙 ‘레룸 노바룸’을 통해 노동자의 정당한 임금과 인간다운 노동 조건 보장, 노동조합 설립 권리 등을 강조했다.
마테오 브루니 교황청 대변인은 “레오 14세라는 교황명은 현대 가톨릭 사회 교리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자 인공지능 시대에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살아가는지 교회가 고민하고 있다는 분명한 메시지”라고 설명했다.
이는 새 교황이 급변하는 디지털·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의 존엄성과 노동의 가치를 재확립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음을 시사한다. 디지털 혁명이 가져올 사회경제적 변화와 윤리적 문제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입장 정립이 레오 14세 재위 기간의 주요 과제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레오 14세가 첫 등장에서 강조한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있기를”이라는 메시지는 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분쟁 등 국제적 갈등이 심화되는 현 시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가톨릭교회는 13억 신자를 보유한 전 세계 최대의 종교 공동체로서, 국제 분쟁에서 중재자 역할을 해왔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해결을 위한 적극적 중재 노력을 기울였다. 레오 14세는 미국과 페루 시민권을 모두 보유한 독특한 배경을 통해 남반구와 북반구,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소통 창구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가 강조한 “대화를 통한 다리 건설”은 분열된 세계에서 가톨릭교회가 맡고자 하는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분열된 세계에서의 ‘평화’ 메시지 = 레오 14세가 직면한 가장 큰 과제는 성직자 성추문과 재정 스캔들로 손상된 교회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를 위한 개혁 작업을 시작했지만 교회 내 저항과 관료주의로 인해 많은 과제가 미완으로 남아있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가톨릭 신자 수가 정체되거나 감소하는 추세에 대응해 젊은 세대를 교회로 불러모으는 것도 시급한 과제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와 소통하는 새로운 방식과 언어를 찾아야 한다는 압박감도 크다.
이 모든 과제 속에서 중도적 성향의 레오 14세는 극단을 피하고 포용적 접근을 통해 교회의 영향력을 재건하려 할 것으로 전망된다. 침착하고 온건한 그의 리더십 스타일이 세계 가톨릭교회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을지 주목된다.
송현경 기자 funnyso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