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진단
우리나라 과학의 미래에 놓인 큰 숙제들
벌써 1학기의 절반 이상이 지나가고 있다. 많은 대학에서 새로운 교수진을 보강하기 위한 신임교원 채용 절차가 진행 중이다. 다른 분야까지는 모르겠지만 필자의 전공 분야인 생명과학 분야에서는 올해 지난해와는 다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지원자 수가 많이 늘었고, 지난해까지 우리나라 ‘시장’에 나오지 않던 탁월한 지원자들이 늘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연구비 사정과 무관치 않은 현상이리라 짐작은 하지만 눈에 보일 정도로 영향이 나타나다니 놀랍다. 노벨상 수상자 제임스 로스만 교수가 2013년 수상 기념 강연에서 “나치에 의해 파괴된 유럽의 과학 공동체를 되살리는 데 50년이 걸렸다”며 “비슷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경고한 바 있지만 그 경고가 무색할 일이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트럼프의 대학정책, 우리에게 득될까
미국에서는 새로운 대통령이 예측 불가능한 정책들을 쏟아내고 있고 R&D 문제도 심각해 보인다. 대학에 대한 압박도 만만치 않아서 우리나라 학생들을 포함해 대학원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입학허가를 주었다가 거두어들이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 정부 연구비 집행이 기약 없이 연기되고 있어 연구자들이 불안에 떨어야 하고 대학에 대한 면세 특례를 없애겠다는 위협마저 난무한다.
명분이나 목표가 없어 보이는 이런 비상식적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현실적으로는 아마도 단기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은 의미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런 미국의 상황이 우리의 기회일 수도 있을까. 나치의 핍박을 피해 수많은 과학자가 미국으로 옮겨갔고 그때부터 미국이 세계 과학기술의 중심이 되었다. 비슷한 기회를 우리라고 가지지 말란 법은 없다.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그런 기회는 없을 것 같다. 미국의 사정이 나빠지기 전 우리나라는 이미 2024년 정부 R&D 삭감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당했다. 명분과는 별개로 논의와 숙의 없이 진행되어 파국에 이른 의대 증원 사태까지 겹쳐 우수 인재들이 과학기술을 외면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의대 증원 사태는 아직도 진행형이지만 최소한 얼핏 보기에 정부 R&D는 상당 부분 위기를 넘기고 있는 것 같다. 정부 당국이 발 빠르게 현장의 아우성에 귀를 기울였고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리고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했던가. 이왕 엎질러진 물, 새 그릇에 다시 담는 것도 현명한 방법일 수 있겠다.
2024년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그동안 정부 R&D의 규모는 꾸준히 성장해왔다. 하지만 양적성장이 곧 높은 단계의 연구 질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이제 다시 새로운 철학과 방향을 가지고 미래에 대비할 수 있으면 전화위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위기극복은 확실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지원정책의 역사적 흐름을 살펴보면서 현실을 보면 미래 방향은 저절로 드러난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은 산업화를 뒷받침할 수 있는 기술 개발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설립했고 최장수 과기부장관이었던 고 최형섭 전 장관은 당장은 기술개발에 치중해야 하지만 일정 수준 이후에는 기초연구를 지원해야 한다는 산업화 이후의 우리나라 과학기술 정책 방향까지 제시한 바 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최형섭 전 장관의 1단계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 반성해본다. 기술 개발에 힘을 써야 하지만 기초과학 지원에 더욱 힘을 써야 하는 때인 것이다. 기초연구의 결실이 없이 기술주권 확보는 신기루일 뿐이다.
중국의 과학기술 중심 철학이 부러운 이유
10년 전쯤 중국 대학들의 연구지원 제도 현황을 파악하고자 방문했던 적이 있다. 그때 놀랐던 것은 이들 연구중심대학은 교수를 모셔오기 위해 파격적인 제안을 할 뿐 아니라 모든 대학원생이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연구 이외에는 걱정할 필요가 없도록 해 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큰 규모의 연구비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파격적인 지원을 일부 연구중심대학에 몰아주는 것에 대한 부담이 없는지 물었을 때 돌아온 답은 “우리는 한쪽 어깨에 자부심을 다른 어깨에 사회적 책임감이라는 무게를 지고 있으므로 당당하다”라는 것이었다.
지난 4월 과학혁신과 지정학적 위기를 중심 의제로 하는 두뇌집단인 최종현학술원에서 진행한 과학기술정책 포럼에서 의미 있는 제안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필자의 마음을 흔든 것은 중국의 사례였다. 미국과 우리나라의 사정을 잘 알기에 중국을 주시할 수밖에 없다.
이번 포럼에서 북경대측의 발표 내용 중에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과도 부합하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중국은 이미 1995년에 과학기술이 국가경쟁력의 최우선임을 천명했으며 이 기조는 한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올해를 대학 차원에서도 ‘과학기술의 해’로 삼고 심기일전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이렇게 해 온 것이 최근에 나타나는 중국의 탁월한 실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라는 한계가 결국은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당장은 규제와 통제 속에 우리로서는 이해 또는 설명이 힘든 묘한 유연성을 발휘하는 것으로 한계를 조금씩 밀어 올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체제이기에 모방할 필요는 전혀 없지만 원칙에 대해서는 참조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특히 지난 30년 이상 흔들림 없이 지속되어 온 과학기술 중심 철학은 부러울 따름이다.
생명과학의 예를 들어 보면 중국도 얼마 전까지는 사람에 적용되는 근접기술 개발에 치중하고 있어서 필자의 전공분야인 예쁜꼬마선충 생물학을 전공하는 연구자는 발을 붙일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는 기초연구에 대한 파격적인 지원도 하는 과학대국이 되어 있다. 과학은 국경이 없을지 몰라도 과학자나 과학의 산물은 국경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니 조금은 두렵기도 하다.
추격형 과학이냐 선도형 과학이냐의 기로
추격자로 사는 것에 만족할 것이면 모르되 세상을 선도하는 일류국가로 나아가길 원한다면 우리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추격자로 살기로 한다면 아마도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퇴보하는 상황이 되고 말 것이니 이 또한 두려운 일이다.
미래의 과학기술은 어떤 식으로 돌파구를 찾아가야 할까. 다시 생명과학의 예를 들어 보자. 지난 4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유럽분자생물학기구에서 개최한 워크숍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주제가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세포 및 지구 수준에서의 협업’ 정도로 번역되는 생소한 모임이었다. 기후위기는 그동안 많은 연구와 현실적 대응책들이 논의되고 집행되고 있는 주제이지만 그 주제가 전통적 생물학의 한 분야인 세포생물학과 연결되는 상황은 처음이다.
이런 시도가 선도적 과학의 주제가 아닐까. 여전히 추격형 과학을 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선도자로 나설 것인가 그것이 우리나라 과학의 미래에 놓인 큰 숙제다. 전통을 중시하되 그것들을 연결해 탄생하는 새로운 과학기술 분야가 미래의 의제일 것이다.
2025년 우리는 대전환기에 서 있다. 인공지능 시대, 우리는 혁명적 수준의 과학혁신 시대에 살고 있다. 과학기술의 양적성장을 질적도약으로 견인하고자 하는 노력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 곧 새로운 정부가 출범한다. 인수위원회가 없이 바로 시작해야 하는 정부이니 준비를 미리 해야만 할 것이다. 다양한 현장에서의 정책 제안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고 의미 있을 것이다. 과학의 미래를 위한 기본철학은 다양성 위에 수월성을 쌓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