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다시 경제민주화를 소환하는 이유
한국개발연구원(KDI))은 8일 보고서에서 “올해 잠재성장률은 1%대 후반으로 추정되며, 2040년대 후반에는 0% 내외까지 하락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분석했다. 잠재성장률은 한나라의 경제가 보유하고 있는 자본 노동력 자원 등 모든 생산요소를 투입해 물가상승을 유발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이룰 수 있는 경제성장률 전망치다. KDI는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이 이렇게 낮은 이유로 급격한 저출산·고령화와 자본투입 감소, 총요소생산성 둔화로 봤다. 특히 인구구조 변화가 가장 큰 요인이라고 진단했다.
KDI뿐 아니라 국회 예산정책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주요 기관들이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을 2%대에서 1%대로 낮췄다. KDI는 올해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을 0.8%로 대폭 끌어내렸다. 1%대 후반으로 떨어진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연구기관들은 △고령층 재고용 △여성 일·가정양립 환경 조성 △경쟁제한 규제 △기술개발과 생산성 향상 등을 제안한다.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해야 할 일들
우리나라는 수출중심 대기업 주도 경제체제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나라 기업의 99%가 중소기업이고 중소기업 종사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 80.9%다. 이들 80.9%가 출산 육아 양육을 감내할 수 있어야 출산율이 우상향할 것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근로자 임금 차이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 300인 이상 사업체 정규직 임금을 100%로 가정했을 때 300인 미만 정규직 임금은 지난해 기준 57.7%로 조사됐다. 게다가 중소기업의 재벌대기업 하청화는 임금격차 축소를 기대하기 어렵게 한다. 하청업체 기술을 원청이 가져가거나 탈취하는 불공정관계 개선은 중소기업과 창업자들에게 자유롭고 공정한 경영환경을 제공하는 필수조건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올바른 생태계 정립은 경제민주화의 주요한 과제이자 결과다.1987년 헌법 개정 때 경제민주화 조항을 넣은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경제민주화는 경제성장에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효율을 높이고 사회를 조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저성장 시기에 경제민주화를 추진해야 하나’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박상인 서울대행정대학원 교수는 “재벌의 경제력 집중 해소없이는 중간재 산업의 고도화와 새로운 도전기업, 신성장동력 산업의 출현을 기대하기 어렵다”며 “장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경제민주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극심해지고 있는 양극화 문제 해결 방안 중 하나도 경제민주화라고 할 수 있다. 성장의 과실을 특정계층만 계속 누린다면 경제가 살아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공정한 경제생태계가 만들어져야 경제성장도 가능하다. K-뷰티가 지난해 일본과 미국 수입 화장품 1위를 한 배경은 대기업과 중견기업 중소창업자들 생태계가 조화롭게 구축됐기 때문이다.
경제민주화의 헌법 근거는 119조 2항이다. 1항은 경제질서 기본원칙을 규정한다. 국가가 경제주체 간 조화를 통한 경제 민주화를 위해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으면서도 경제질서의 기본인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 자유와 창의를 존중해야 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경제민주화는 재벌대기업을 해체하기보다 적절히 규제해 경제주체 간 조화와 활력을 높여주자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효율을 극대화하면서 사회안정을 달성하는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라는 공감대가 절실하다.
경제민주화, 경제성장 가능하게 하는 과정이자 방향
경제민주화 내용은 △경제적 강자 갑질 방지 △재벌 경제력집중 억제와 지배구조 개혁 △소비자 보호 △근로자·소상공인·자영업자 보호 △자본시장 개선 등으로 대별된다. 박근혜정부와 문재인정부에서 논의되던 경제민주화는 윤석열정부를 거치며 이슈에서 사라졌다. 윤석열정부는 재벌규제를 다루는 공정위 부서를 축소하기도 했다.
다만 최근 주주가치 제고를 위한 상법 개정안이 발의되면서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기업 지배구조 개혁으로 자본시장 공정성을 확보하고 밸류업을 통해 자본의 생산성 제고를 통한 경제성장을 이루어야 한다는 취지가 상법 개정안에 녹아있다. 이런 점들이 주가에 반영된다면 국민은 주식투자로 자산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21대 대선이 2주 앞으로 다가온 지금 주요정당 후보들의 공약에서도 경제민주화란 단어는 보이지 않는다. 경제민주화는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헌법 가치를 가진 ‘과정’이자 ‘방향’이라는 점이 이번 대선공간에서 논의돼야 한다. 더 나아가 6월 출범하는 새 정부의 경제정책에도 반영되기를 바란다.
범현주 산업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