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진단
미국의 개입 축소, 세계안보에 드리운 힘의 공백
열흘 뒤 출범을 앞둔 차기 정부는 인수위 없이 즉시 업무를 개시해야 한다. 대통령 후보자 TV 토론에서도 외교 분야가 빠진 상태에서 외교전략에 대한 후보들의 견해는 오리무중이다. 현안에 대한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는지 우려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제2차세계대전 이후 가장 급격한 국제질서의 변동 시기를 맞고 있다는 인식은 국내외에서 일치한다. 뚜렷한 변화는 미국의 리더십이 약화되고 대외개입을 자제(restraint)하면서 지구적으로 나타나는 질서의 공백이다. 세계안보질서는 미국의 개입 축소로 인해 힘의 공백이 출현하고 다수의 분쟁이 분출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미국의 직접적 군사개입 자제, 가자지구에서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충돌에 대한 소극적 대응은 대표적 사례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현재까지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는 물론 이란 핵문제, 예멘, 인도-파키스탄, 콩고-르완다 등 다양한 국제문제에서 장기적인 평화보장자의 역할보다는 단기적인 분쟁 브로커의 역할을 하고 있다.
미중간 완전한 디커플링은 불가능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세계는 미국 주도의 패권기반 국제질서에서 벗어나고 있다. 국제질서의 변화에 대해 세 가지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세계가 여러개의 영향권, 권역으로 나뉘어지면서 안정적인 다극체제가 정착되지 못한 채 불안한 다극화가 지속되는 경우 △미중의 전략경쟁이 강화되면서 신냉전 현상이 증폭되는 경우 △미국의 역할이 약화되지만 기존의 자유주의 규칙기반 국제질서가 다시 강화되며 여러 선진국들의 협력이 강화되는 경우 등이다.
우선 중국을 비롯한 지역 강대국들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장기화된 갈등이 재현되는 등 세계질서가 여러 영향권, 권역으로 쪼개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다수의 권역이 등장하고 이를 통제할 글로벌 규범이 부재할 경우 권역 간 군사충돌 가능성이 증대될 수 있다. 중국 러시아 북한 등 미국 주도질서를 패권적 질서로 비판하는 국가들은 다극체제를 이상적 대안으로 간주하지만 한국 입장에서는 쉽게 수용하기 어려운 구조다. 지정학적 단층선에 위치한 한국과 같은 국가들은 더 큰 충돌위험에 직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미중관계를 신냉전 담론으로 단순화하는 것도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현실인식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다. 미중경쟁을 단순한 패권전쟁이나 20세기 냉전의 재현으로 이해하기에는 그 구조가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다음과 같은 미중경쟁의 향후 양상은 반드시 유념해야 할 내용들이다. 첫째, 미중 간 본토를 겨냥한 전면전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양국 모두 핵무기와 2차 타격 능력을 보유하고 있어 상호확증파괴(MAD)의 균형에 도달해 있다. 대신 제3지역에서의 제한전이나 회색지대 전략이 더 유력하며 특히 대만해협과 남중국해는 위험지역이다. 그러나 열전지역을 둘러싼 국지전이 전면전으로 확전되는 것을 양국 모두 억제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둘째, 미국과 소련의 완전한 경제적 단절 속에서 이루어진 20세기 냉전과는 달리 미중 간 완전한 경제의 디커플링(decoupling)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1970년대까지 미국과 소련 간 무역은 미국 전체 무역의 1% 미만 수준에 머물렀다. 이에 비해 미중 간의 무역은 최고치를 경신해왔고 제네바에서 열린 양국의 관세협상에서도 나타나듯 양국은 분쟁 속에서도 상호무역을 지속할 의사를 내비치고 있다.
중국산 중간재·완제품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미국과 미국 시장과 기술, 투자에 대한 의존이 큰 중국 간 타협이 불가피한 것이다. 향후에도 양국간 전략적 경쟁과 경제적 상호의존이 병행되는 이중구조가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셋째, 미중 양국 모두 세계질서를 주도할 만큼의 완전한 패권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 중국은 기술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침체와 내수부진이라는 이중구조를 안고 있으며, 미국은 첨단기술과 서비스 산업의 강점에도 불구하고 제조업 기반 약화와 공급망 취약성이라는 문제를 내재하고 있다. 이는 양국 간 경쟁이 단순한 승패의 게임이 아니라 서로의 취약성을 방어하려는 ‘버티기 경쟁’이 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넷째, 설사 양국 중 한 국가가 패권경쟁에서 후퇴하더라도 강대국의 지위를 내려놓고 주저앉기는 어렵다. 미중은 모두 인구 경제규모 군사력 등에서 최소한 지역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지속할 기반을 갖추고 있다. 한국은 미중 전략경쟁 결과와 상관없이 양국 모두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다섯째, 오늘날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위상은 냉전기 제3세계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화되었다. 미중을 포함한 강대국들은 이들을 포섭하기 위한 전략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수밖에 없다. 강대국 지정학의 모습이 두드러진다 해도 향후에는 좀 더 포괄적이고 참여적인 국제질서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여섯째, 기후변화, 환경위기, 전염병 대응, 신기술 규범, 핵 전쟁 억제 등 인류공멸의 위기 영역에서는 미중 간 생존을 위한 협력이 불가피하다. 첨단기술 경쟁과 외교적 대립이 고조되는 가운데에서도 이러한 분야에서는 전략적 대화와 규범 구축이 병행될 수밖에 없다.이러한 복합적인 현실은 신냉전이라는 비유가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한국 내에서 미중 간 명확한 편들기 논의는 현실과 맞지 않다.
국가들간의 경쟁 초연결 세계로 만들어
국제질서의 세번째 시나리오는 미국의 리더십이 약화되는 가운데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는 미래다. 지난 30여년 동안 지구화는 포퓰리즘과 반세계화 물결 속에서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특히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지구공간은 빠른 속도로 촘촘해지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국가들 간의 이러한 경쟁은 초연결의 세계를 만들어 지구적 공론장을 확대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트윗 발언 하나가 전세계에 실시간으로 알려지는 지금 기술 민족주의조차도 글로벌 소통구조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 모든 정치적 메시지는 지구화되고 있으며 글로벌 시민의 공감대와 행동도 확산되고 있다.
다층적 글로벌화가 심화되는 가운데 여러 국가들, 특히 강대국 지정학으로 얼룩진 정치적 상부구조는 더욱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단기적으로는 치열한 강대국 경쟁과 권역 간 분리, 분쟁과 경제민족주의가 대두할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불가피하게 패권전쟁이 도래하고 국제정치에서 정글과 같은 질서가 자리잡을 것이라고 섣불리 예단해서는 안된다.
한국의 역할 능동적으로 재정의해야
이와 관련해 한국의 신정부는 우선 정확한 국제질서 변화에 대한 담론을 정립해야 한다. 국제질서에 대한 담론의 수준이 국가의 위상을 결정하는 시대인 만큼 한국 신정부는 국제사회가 참고하고 본받을 수 있는 국제질서의 진단과 담론을 선보여야 한다.
다음, 미중 패권경쟁과 신냉전, 강대국 간 영향권 경쟁, 반세계화와 기술민족주의 등 당장 나타나는 어지러운 질서 이면에 작동하고 있는 국제질서의 동력을 직시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다가온 위협과 피해를 최소화하면서도 보다 포용적이고 합리적인 국제질서의 미래를 추구해야 한다.
미국의 역할이 현저히 줄어들어 리더십 부재를 겪고 있는 지금 선진국과 중견국의 협력이 중요해졌다. 이들 국가들 역시 이익의 충돌과 리더십 부재로 혼란을 겪을 수 있다. 패권 이후 규칙기반 국제질서를 만드는데 한국이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리더십을 기획하고 실천해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신정부는 국내정치의 난맥상에 얽매이지 말고 사회통합과 내부결속을 바탕으로 변화하는 세계질서 속에서 한국의 역할을 능동적으로 재정의해 나가는 정치력을 확보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