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미국 자산 탈출’ 가속
무너지는 수출-달러 투자 모델…내수 활성화·지역 분산투자 필요
특히 최근 급등한 아시아 통화가 충격을 키웠다. 대만 보험사들은 지난 4월 미국 투자자산에서 6억2000만달러에 달하는 손실을 입었다고 밝혔다. 5월 초 대만달러가 2거래일 만에 8.5% 급등하며 환헤지(환율 변동에 따른 손실을 막기 위한 파생상품 거래)를 하지 않았던 자산에서 약 180억달러 규모의 평가손이 발생했다는 추정도 나왔다. 대만 정부는 기업들의 해외투자 자산의 90% 이상이 달러 표시라고 밝혔다.
엔화 강세 또한 달러 자산 매도를 부추겼다. 일본은행(BOJ)의 금리 인상 전환 이후 2024년 7~8월 사이 엔화는 달러 대비 14% 상승했다. 문제는 이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수년간 활용돼 온 ‘캐리 트레이드’ 전략이 붕괴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캐리 트레이드는 금리가 낮은 엔화를 빌려 미국 등 고금리 자산에 투자하는 구조인데, 엔화가 갑자기 강세를 보이자 투자자들은 2007년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포지션을 청산했다.
거시경제 컨설팅 회사 글로벌데이터 TS 롬바드에 따르면 캐리 트레이드에 얽힌 규모는 1조1000억달러에 달한다. 이 전략이 무너지자 엔화는 더욱 강세를 보였고, 이로 인해 포지션 청산이 추가로 가속되며 악순환이 벌어졌다.
일본의 3대 은행 시가총액은 이틀 만에 약 850억달러 증발했고, 글로벌 금융시장도 동요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무역정책도 압박 요인이다. 트럼프는 제조업의 미국 회귀를 공언하며, 아시아 국가들이 환율을 낮춰 수출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고 비판해 왔다. 트럼프는 2기 임기 시작 이후 아시아 수출국에 예고 없는 고율 관세를 부과했고, 이에 일본과 한국이 급히 협상 테이블에 나서면서 시장은 환율이 무역 협상 의제에 포함되는 것 아니냐는 추측에 휩싸였다. 미국 재무부는 매년 주요 교역국의 환율 조작 여부를 평가하는데, 현재 중국, 일본, 대만, 한국, 베트남, 싱가포르 등이 감시 대상에 올라 있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일본 최대 생명보험사 닛폰생명은 미 국채 투자 비중을 줄이고 유럽, 호주, 캐나다로 분산투자에 나섰다. 호주 대형 연기금 유니슈퍼도 미국 자산 비중 축소 계획을 밝혔다. UBS, 알리안츠, 피델리티 등 주요 글로벌 자산운용사들도 아시아·유럽·금·암호화폐에 눈을 돌리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올해 4월 일본으로 유입된 해외 자본은 주식과 채권 합쳐 약 570억달러로, 관련 통계 집계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달러에서 자금을 빼내 아시아로 되돌리는 이른바 ‘달러 언와인드(dollar unwind)’ 현상은 이미 시작됐다는 평가다.
이번 흐름은 단순한 일시적 조정이 아니라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형성된 아시아의 수출-대미 투자 전략이 구조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신호로 보인다. 당시 외환위기를 계기로 아시아는 달러 보유 확대와 대미 흑자를 통해 외환 안정성을 확보했고, 벌어들인 외화를 미국 주식·채권 등에 재투자하는 순환 구조를 구축해 왔다.
하지만 무역과 환율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트럼프식 정책, 미국의 재정 불안, 무디스의 미 국채 등급 강등은 이러한 모델의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글로벌 자산운용사 가마(GAMA)의 라지브 드 멜로는 “대만달러의 급등은 단발적 사건이 아니라, 세계 금융 체제의 변화를 알리는 경고”라고 말했다.
달러 지배 체제가 질서 있게 해체되고, 아시아로의 자본 회귀가 본격화되면서 저평가된 통화가 상승하고, 외국 자금이 유입되며 실질 금리는 하락하고 자산 가격은 오르는 ‘3중 혜택(triple-merit)’ 구도가 형성될 수 있다고 리서치 업체 게이브칼(Gavekal)의 선임 신흥국 애널리스트 우디트 시칸드가 전망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도를 현실화하려면, 아시아 각국이 수출 의존에서 벗어나 내수 중심 경제로 전환하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
중국의 가계 저축률은 30% 이상으로, 아시아 경제가 소비보다 저축에 무게를 두어온 구조 자체가 수출 주도의 배경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재도 중국과 일본의 수출은 각각 GDP의 약 17%에 해당한다.
스티브 알랭 로렌스 발포캐피탈 최고투자책임자는 “트럼프 시대의 관세와 정책 불확실성은 위험 인식 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며 “그는 기존의 탈달러화와 디커플링 흐름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양현승 기자 hsy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