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심리적 내전 치유, 바로 시작할 때다

2025-06-02 13:00:55 게재

내일(6월 3일)은 대선 투표일이다. 새 정부가 직면할 가장 시급한 과제는 아마 분열된 대한민국을 어떻게 다시 하나로 묶을 것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칼 슈미트(Carl Schmitt)는 “정치란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이라 했다. 정치가 적대의 논리로만 작동하는 현실이 지금처럼 극대화된 적이 없었다. 12.3 계엄사태 이후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심리적 내전’ 상태다. 같은 하늘 아래 서로 다른 현실을 살고 있는 두개의 국민. 이들 사이의 골은 이제 단순한 정치적 견해 차이를 넘어 존재론적 적대 수준에 이르렀다.

분단의 유산과 디지털 혁명이 만든 ‘정서적 양극화’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진보와 보수가 각각 약 30%, 중도는 30~35% 수준으로 분포한다. 지표로는 균형잡혀 보이지만 갈등의 깊이와 강도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격화되었다. 이런 극한대립이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 뿌리는 한국전쟁 이후 80년 가까이 지속된 분단의 상흔에 있다. 분단체제는 우리에게 ‘적과 동지’의 이분법적 사고를 체화시켰다. 민주화 이후에도 이 사고방식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정치갈등의 프레임으로 전환됐다.

여기에 디지털 혁명이 갈등을 증폭시켰다. 디지털 알고리즘은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에 더 많은 노출 기회를 제공한다.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의견만 접하는 ‘알고리즘의 편견’에 갇혀 확증편향을 강화한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갈등심화 → 진영논리 강화 → 상대방 비인간화 → 대화단절 → 갈등심화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샨토 아이엔가(Shanto Iyengar)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정치학 교수는 이를 ‘정서적 양극화(affective polarization)’라고 명명했다. 정책적 차이보다 상대방에 대한 감정적 혐오가 앞서는 현상이다. 상대방을 단순히 정치적 경쟁자가 아닌 도덕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지금 우리 모습이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다. 독일은 통일 3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동독지역 주민들의 서독에 대한 불신과 상대적 박탈감이 여전히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독일은 회피하지 않았다. 독일 연방정치교육원은 연간 약 7600만유로(약 1200억원)의 예산으로 정치교육, 시민통합, 민주주의 학습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중 일부는 동서독 주민 간 이해증진에도 활용된다.

학교에서는 의무적으로 ‘민주주의와 관용’ 교육을 실시한다. 무엇보다 갈등해결을 ‘국가적 과제’로 인식하고 체계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교훈은 명확하다. 갈등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으며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12.3 내란사태 후 우리 사회가 치유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과제가 선행되어야 한다. 첫째, 감정치유다. 트라우마에 빠진 공동체의 상처부터 돌봐야 한다. 온라인 혐오표현을 강력히 규제하고 상대를 다시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감대를 회복해야 한다. 둘째, 인식 변화다. 편견해소 교육과 가짜뉴스 감별 교육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 선동과 왜곡에 휘둘리지 않는 시민을 길러내는 것이 민주주의 방역의 출발점이다. 셋째, 관계회복이다. 갈라진 집단들이 다시 마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국민대화위원회 같은 대화의 장을 실질적으로 작동시키고 지역·세대 간 시민토론회를 활성화해야 한다. 넷째, 제도개혁이다. 승자독식의 선거제도를 개선하고 비례성과 공론성을 강화해야 한다. 특히 민주시민교육을 제도화 체계화함으로써 다음 세대는 이러한 극단적 대립을 반복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현재의 ‘심리적 내전’은 새로운 전환의 기회될 수도

이제 곧 새 정부가 출범한다. 새 대통령은 갈등을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하려는 유혹을 경계하고 진정한 화합의 리더십을 보여야 한다. 언론은 자극적 보도 대신 균형잡힌 시각을 제공해야 하며 시민들은 확증편향을 내려놓고 열린 태도로 대화에 임해야 한다. 12.3 내란사태로 표면화된 갈등은 분명 위기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전환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 갈등을 딛고 우리는 민주주의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차이를 인정하되 차별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 갈등을 회피하거나 억누르지 않고 제도화된 방식으로 해결해나가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역사는 내일 우리에게 하나의 선택을 요구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대선 후 5년간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다. 분열인가 통합인가. 갈등인가 화합인가. 그 긴 여정은 바로 내일 투표장에서 시작된다.

김기수 정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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