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 규제 패러다임 전환이 절실하다

2025-06-04 12:31:48 게재

규제기관, 새질서 설계하고 신산업

이끄는 전략 기관으로 진화해야

제21대 대통령 선거를 마치고 새 정부가 출범한 지금, 우리 사회는 기술과 산업, 글로벌 질서가 동시다발적으로 재편되는 거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이 격변의 시대에 규제기관의 역할은 단지 ‘심사하고 허가하는’ 기능에 그쳐서는 안 된다. 오히려 새로운 질서를 설계하고 미래 산업의 성장을 이끄는 전략 기관으로 진화해야 한다. 그 중심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 등 규제기관이 있다.

지난 정부는 규제기관의 기능 현대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의료기기·바이오헬스 분야에서 국제 조화를 위한 규제 정비, ‘규제혁신 4.0’을 통한 일부 절차 개선,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신속허가 체계 도입 등 성과도 분명히 존재했다. 이로 인해 K-진단키트와 백신 개발 등의 성공 사례가 가능해졌고 일부 제도는 글로벌 모범사례로 주목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국민과 산업계가 체감하는 변화는 여전히 미흡했다. 그 이유는 제도 변화가 정부 내부에만 머물렀고 기술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채 절차 중심의 규제방식이 그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인허가 체계는 여전히 복잡하고 가시성이 낮았으며 민관 간의 실질적인 소통 구조도 제한적이었다. 또한 규제기관 내부의 전문인력 확보나 유연한 조직 운영에는 구조적인 제약이 따랐다.

이제 새 정부는 이러한 한계를 냉철히 직시하고 규제기관의 정체성과 역할을 다시 설정해야 한다. 단순한 규제 완화가 아니라 규제의 패러다임 전환, 다시 말해 규제를 ‘미래를 설계하는 도구’로 활용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기술 발전 속도에 맞는 선제적 규제 설계

앞으로의 규제기관은 먼저 기술의 발전 속도를 반영해 규제를 선제적으로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예측 가능한 규제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업이 개발 초기 단계부터 인허가 방향을 파악할 수 있도록 기술별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고 사전상담과 예비심사 기능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위험 기반의 차등 규제도 확대되어야 하며 고위험 기술과 저위험 기술을 동일한 기준으로 다루는 비효율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한 규제는 산업 혁신을 저해하는 장벽이 아니라 오히려 혁신을 촉진하는 시스템으로 작동해야 한다. 이를 위해 신기술에 대해서는 규제 샌드박스와 실증특례 제도를 확대 적용하고 제도 내에 유연한 규정과 예외조항을 도입함으로써 빠르게 변화하는 산업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규제과학 기반의 평가체계를 강화해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판단이 이뤄질 수 있도록 평가 인프라도 지속적으로 보완되어야 한다.

글로벌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전략 파트너로

아울러 규제기관은 국내 기업의 글로벌 시장 진출을 돕는 전략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 주요 수출국의 인허가 기준과 정합성을 확보하고 동남아나 중남미 국가와의 규제협력 확대, 국내 기준에 따른 상호인정 체계 구축 등을 통해 ‘규제 수출’ 전략도 함께 강화해야 한다. 이는 단지 산업 지원에 그치지 않고 대한민국의 규범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국가 전략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장과 소통하는 자세다. 규제가 국민과 기업을 위한 것이라면 당연히 그 설계 과정에도 산업계 학계 소비자 등 다양한 주체의 목소리가 반영되어야 한다. 민관 협력 구조를 일상화하고 규제개선 과정에서의 투명성과 피드백 체계를 제도화하는 것이 그 시작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과제를 이끌어갈 중심에는 결국 리더십이 있다. 규제기관은 과학적 전문성과 정책적 통찰, 그리고 민감한 사회적 감수성을 동시에 요구받는 조직이다. 새로운 수장은 기술과 시장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공공성과 혁신을 조화시킬 수 있는 철학과 추진력을 갖추어야 한다. 또한 외부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고 내부 조직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경영자로서의 자질도 필요하다.

새로운 시대의 규제기관은 더 이상 단속 기관이 아니다. 변화의 물결 속에서 국가의 안전망을 설계하고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지휘본부가 되어야 한다. 새 정부가 그러한 관점에서 규제기관을 재정비하고 적합한 리더를 선택하길 기대한다. 그 선택이야말로 대한민국의 기술 주권과 산업 도약의 첫 단추가 될 것이다.

이진휴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부회장

이진휴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부회장
이진휴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