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규제기관, 통제자에서 혁신 지원군으로 바뀌어야 산다

2025-06-09 13:00:03 게재

기술과 산업이 빠르게 융합하고 변모하고 있다. AI, 배양육, 마이크로바이옴, 디지털헬스 등 신기술이 연달아 등장하는 시대에, 규제 기관의 역할 역시 재정립되어야 한다. 특히 온 국민의 기대를 안고 출범한 새로운 ‘국민주권 정부’라는 기조에 걸맞게규제 철학의 전환을 통해 산업 혁신과 국민 보호의 균형을 꾀해야 글로벌 경쟁에서 생존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규제 행정은 ‘허용된 것만 가능한’포지티브 방식에 머물러 있다. 이로 인해 신기술의 시장 진입에는 과도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고, 저성장의 늪에서 빠져나올 기회를 스스로 가로막고 있다. 규제는 통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의 안전을 확보하면서도 혁신을 촉진하기 위한 도구여야 한다.

이를 위해 ‘원칙허용, 예외금지’라는 네거티브 규제 방식을 식품·의료제품 분야에도 적극 도입해야 한다. 예컨대 미국은 GRAS(Generally Recognized As Safe) 제도를 통해 일반적으로 안전하다고 인정된 식품첨가물에 대해서는 미국 식품의약국(FDA ) 사전승인제를 면제하고 있다. 이는 기업 자율성과 혁신을 장려하되, 그에 따른 책임도 명확히 하는 구조다.

식품·의료 분야에 네거티브 규제 도입해야

우리도 이미 성공 사례를 갖고 있다. 2011년 도입된 화장품 원료 네거티브 목록 제도는 금지 성분만 명시하고, 나머지 원료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국내 화장품 산업은 자율성과 신속한 제품 개발을 기반으로 생산과 수출이 모두 급성장하며 세계 3위 수출국으로 도약했다.

인허가 제도 운영 방식도 손질이 필요하다. 현재 인허가 체계는 실무자에서 과장, 국장, 기관장까지 수직적으로 보고와 승인을 거치는 구조다. 이는 속도와 예측 가능성 모두에서 한계가 있다. 인허가 초기부터 신청인의 진술권을 보장하고, 전문가 간 수평적 협의체를 구성해 신뢰 기반의 심사 시스템으로 바꾸어야 한다.

성과 지표 역시 혁신적으로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 단순한 처리 건수 중심에서 벗어나, 기업 만족도, 사전 컨설팅 제공, 신기술 인정 실적 등 서비스 지향형 지표로 바꾸고, 적극적 심사 활동을 한 공무원에게는 성과보상을 제공해야 한다. 아울러, 심사결과의 공개범위 확대와 전문가 간 상호검토 등도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이는 데 효과적이다.

디지털 전환도 관건이다. 반복적이고 정량적인 업무부터 AI 기반 심사체계를 도입할 수 있다. 2020년 시작된 수입식품 자동심사시스템은 평균 48시간이 걸리던 심사를 단 5분으로 단축시켰고, 국제 AI 인증도 획득했다. 규제 신뢰성과 품질 향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사례다.

또한 임상시험 부담 완화를 위해 실제임상자료(RWD), 실제임상근거(RWE), 분산형 임상시험(DCT)의 제도화도 시급하다. 주요 선진국은 이미 RWD·RWE 기반의 조건부 허가 및 사후 평가 체계를 통해 신속성과 안전성의 균형을 꾀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에서 규제기관은 통제자에서 지원자, 심사자에서 조력자로 중심을 전환해야 한다.

규제, 기술의 동반자 돼야 세계시장 선도

우리가 지향할 목표는 더 많은 규제가 아니라, 더 좋은 규제다. 규제가 기술의 동반자가 될 때 식품·의료제품 산업은 세계를 선도할 경쟁력을 갖게 될 것이다. 지금 변화하지 않으면, 세계를 따라잡을 기회조차 사라질지 모른다.

권오상 서울대학교 객원교수 전 식품의약품안전처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