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대법관 증원, 숙의·공론과정이 필요하다
요즘 법조계에서는 대법관 증원 문제가 뜨거운 이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대법관 수를 현재의 2배 이상을 증원하는 내용의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발의했기 때문이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지난 4일 민주당 주도로 법안심사소위원회를 열어 대법관 수를 14명에서 30명으로 늘리는 내용의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1년 유예기간을 거쳐 4년간 4명씩 순차적으로 증원한다는 것이다.
법조계와 사법부의 반응을 고려해 이재명 대통령이 민주당에 제동을 걸면서 숨고르기에 들어갔지만 언제든 법사위 전체회의와 본회의에 올릴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면 대법관 증원 문제는 왜 나왔을까. 상고사건이 너무 많아 지금의 대법원 구조로는 헌법(27조 3항)에 보장된 국민들의 ‘신속한 재판 받을 권리’를 충실히 보장할 수 없다는 게 표면적 이유다.
대법관 1명이 1년에 3000건 이상 처리하는 현실
실제 현재 대법원은 폭증하는 사건으로 과부하가 걸려 있다. 사법연감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상고사건은 3만7667건이 접수됐다. 직접 사건을 담당하지 않는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을 제외한 12명의 대법관이 1인당 한 해 동안 3000건 이상 처리하는 셈이다. ‘양승태 사법농단’도 상고사건 폭증 문제를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2015년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은 ‘상고법원’을 도입해 단순 권리구제형 사건을 맡도록 하고, 대법원은 그야말로 법률심으로서 법령 해석·통일이 필요한 사건을 맡도록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법원행정처가 박근혜정권과 ‘재판 거래’를 시도했다는 등의 의혹이 제기되며 사법농단으로 비화됐다. 이후 상고법원은 사실상 ‘금기어’가 됐다.
전임 김명수 대법원장도 취임과 동시에 4년여에 걸쳐 상고제도 개선 방안을 마련한 바 있다. 그 결과물로 2023년 1월 5일 상고제도 개선을 위한 방안을 담은 ‘상고심관계법 개정의견’을 대법원장 입법의견으로 국회에 제출한 바 있다. 상고사건을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 ‘상고심사제 도입’과 이를 전제로 한 ‘심리불속행제도 폐지’ ‘대법관 4명 증원’이 주요 내용이다. 이 또한 법률 개정으로는 연결되지 못했지만 사법부 내에서도 대법관 증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낸 것이다.
정치권과 법조계에선 '상고허가제 도입'과 하급심 강화를 통한 사건 감축 없이 대법관 수만 늘리는 것은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자칫 통일적 법 해석과 사회적 방향 제시라는 정책법원 기능까지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현실적 문제들에 대한 검토도 필요하다. 대법관 수를 14명에서 30명으로 늘리면 집무실 공간, 부속실 인력 등이 두 배 이상 필요하다. 현재 대법원 재판연구관은 131명(법관 101명, 비법관 30명)인데, 대법관 증원에 따라 두 배 수준의 확충이 불가피하다. 이 경우 하급심의 판사 부족 문제와 함께 하급심의 부실로 오히려 상고사건이 늘어나는 악순환을 겪게 될 수도 있다.
국회 법사위 소속 민주당 박희승 의원은 “대법관을 증원하면 그에 따라 하급심에 있는 우수한 인력인 부장판사급 재판연구관들을 100명 이상 끌어와야 한다”며 “이는 하급심의 부실 심리로 인해 상고사건을 더 늘리는 역효과가 발생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참여정부 사법개혁 작업을 이끈 김선수 전 대법관도 12일자 법률신문 기고문에서 대법관 증원에 대해 “하급심 강화라는 법원의 근본적 개혁방향과 어긋나는 측면이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1심 판사를 증원하는 것이 급선무"라며 "대법원이 중요 사건에 대해 충실하게 심리하고 법령해석의 통일이라는 정책적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심도 있게 심리할 사건을 선별하는 ‘상고심 실질 선별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대법관보다 1심 법원 판사 증원이 급선무
법원 내부에서는 지난달 1일 이재명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유죄 취지 파기환송 이후 민주당이 사법부를 압박하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앞서 조희대 대법원장은 지난 5일 출근길에 기자들과 만나 "공론의 장이 마련되길 희망한다"며 사실상 반대의견을 표명한 바 있다.
국민들의 신속한 재판 받을 권리를 위한 사법개혁 방안으로 제시된 대법관 증원 문제가 숫자에 매몰된 ‘의대생 3000명 증원’의 전철을 밟아서도 안된다. 전임 대법관과 판사 출신 여당 국회의원은 물론 대법원장도 숙의와 공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의견을 내고 있는 만큼 대법관 증원 문제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이선우 기획특집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