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들고 필리핀 도피한 은행원, 18년 만에 송환

2025-06-27 13:00:18 게재

국제 공조에 국외 도피범 속속 검거 … 지난해에는 역대 최대 691명 강제송환

최근 국외로 도피한 범죄자들이 잇달아 국내로 강제송환되고 있다. 경찰 안팎에서는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던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전년도 기록을 경신할지 관심이 모인다. 특히 경찰도 국제공조를 강화하며 국외 도피 범죄자들에 대한 수사망을 좁히고 있다.

경찰청은 국내 시중은행에서 대출 업무를 담당하며 돈을 빼돌린 뒤 해외로 도주한 50대 전직 은행원을 27일 오전 18년 만에 국내로 강제 송환했다.

A씨는 18년 전인 2007년 국내 시중 은행에서 대출 담당 과장으로 근무하던 중 대출 관련 서류를 허위로 조작해 약 11억원을 횡령했다. 필리핀으로 도망간 A씨의 범행은 성공한 듯 보였다.

그러나 2024년 9월 행정 서류 발급을 위해 필리핀 이민청에 방문했다가 현장에서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 적색수배자란 사실이 들통나 덜미를 잡혔다.

온라인 도박사이트 운영자 B씨도 같은 항공편으로 도피 10년 만에 강제 송환됐다.

그는 2015년부터 공범 6명과 함께 필리핀을 거점으로 도박금 160억원 규모의 온라인 도박 사이트를 여러 개 운영한 혐의를 받는다. B씨는 지난 3월 코리안데스크(한인 사건 처리 전담 경찰관)와 필리핀 이민청 수사관이 공조해 차량을 미행한 끝에 검거됐다.

이준형 경찰청 국제협력관은 “이번 송환은 현지 대사관과 필리핀 이민청, 코리안데스크가 합심해 검거 및 송환이 성사된 우수 사례”라며 “앞으로도 국내외 공조 역량을 결집해 총력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범털’ 도피범 허주호 전 대주그룹 회장도 = 이들 외에도 최근 국외 도피 범죄자들의 송환이 잇따르고 있다.

탈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지고도 해외에 장기간 체류한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도 출국 10년 만인 지난달 송환됐다.

허씨는 2007년 5~11월 지인 3명의 명의로 보유한 대한화재해상보험 주식 매각 과정에서 양도소득세 5억136만원 등을 내지 않은 혐의로 2019년 7월 기소됐다. 검찰 수사는 2014년 7월 서울지방국세청의 고발로 시작됐는데, 허씨는 2015년 7월 참고인 중지 처분이 내려지자 2015년 8월 돌연 뉴질랜드로 출국했다.

허씨는 조세 포탈 혐의 재판과 별도로 대주그룹에서 100억여원을 빼내 전남 담양의 골프장에 넘긴 혐의(횡령·배임) 등 여러 건의 고소·고발 사건으로 경찰 수사선상에도 올라 있다.

앞서 4월에는 태국에서 국내로 대량의 마약을 반입해 서울 강남 클럽을 비롯해 전국에 퍼뜨린 범행을 주도한 밀수조직 총책 C씨가 국내로 강제 송환됐다.

C씨는 한국인·태국인 등으로 구성된 다국적 운반책을 통해 2022년 10월부터 2024년 11월까지 600억원 상당의 필로폰·케타민 등을 들여와 국내에 유통·판매한 혐의를 받는다.

운반책들은 주요 신체 부위에 마약류를 숨긴 채 항공편을 통해 국내로 밀반입했다.

젊은층에서 일명 ‘케이’ 또는 ‘클럽 마약’으로 불리는 케타민은 유통조직의 손을 거쳐 강남 클럽 등 전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검찰과 경찰은 당시 국내 유통조직 총책을 검거하는 등 조직을 거의 뿌리 뽑다시피 일망타진했으나 밀수조직 총책인 C씨를 붙잡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에 경찰청은 2023년 7월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 적색 수배서를 받아 C씨를 핵심 등급 국외 도피사범으로 지정했고, 국가정보원과 연계해 해외 첩보를 수집했다.

한국·태국 합동 추적팀은 2024년 11월 태국 콘캔 지역에서 C씨가 은신 중인 것을 확인해 검거했다.

◆주요 도피국 수사기관과 신뢰 구축 = 범죄를 저지르고 해외로 도망친 범죄자를 검거해 국내로 송환한 건수가 지난해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경찰청 등에 따르면 경찰은 지난해 역대 최대규모인 691명의 국외 도피사범을 검거해 국내로 강제 송환했다. 도피사범 송환 건수는 △2021년 373명 △2022년 403명 △2023년 470명 등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검거 인원이 증가세를 기록하는 데는 주변국 경찰과 인터폴 공조체제가 활성화됐을 뿐만 아니라 현지 수사기관과 협조체제가 강화됐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경찰은 치안역량과 치안기술 인프라스트럭처를 전수하는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ODA를 통해 한국의 수사 노하우를 전수하면서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 등 주요 도피국 수사기관들과 신뢰를 구축했다.

경찰청은 또 지난달 27~30일 서울에서 2025년 인터폴 도피사범 검거 합동 작전 회의(INFRA-SEAFⅢ)를 개최했다. 인터폴과 공동으로 주최되는 이번 회의에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11개국 수사기관, 인터폴 본부 그리고 문화체육관광부, 해양경찰청, 관세청 등 국내 주요 법 집행기관이 참석했다.

인터폴 도피사범 검거 합동 작전 회의는 경찰청이 자금을 제공하고 인터폴이 운영하는 도피사범 국제공조 작전 중 하나로, 동남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중대범죄 도피사범을 신속히 추적·검거하기 위한 국제적 치안 협력 프로젝트다. 특히 각국 대표단이 양자 회의를 통해 사전에 선정한 우선 검거 대상 도피사범 명단을 바탕으로 추적 단서와 정보를 교환하고, 검거 및 송환을 위한 전략을 구체화했다.

이준형 경찰청 국제협력관은 “도피사범은 국경을 넘어 활동하기 때문에 국가 간 긴밀한 공조 없이는 효과적인 대응이 어렵다”며 “이번 회의는 범죄자에게 안전한 은신처가 없다는 국제사회의 의지를 분명히 하고, 실효적이고 지속 가능한 협력 체계를 만들어나가는 계기”라고 밝혔다.

2023년부터 인터폴과 공동 추진하고 있는 마약범죄 ‘펀딩 수사’인 ‘마약(MAYAG) 프로젝트’도 국제공조의 대표 사례 중 하나다. 인터폴 자원을 투입해 합동 단속을 진행하는 기획수사다.

장세풍 기자 sp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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