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인상주의 미술은 코페르니쿠스적 혁신이었다
정광균의 80일간 유럽미술관 산책
모더니즘의 서막, 재현에서 표현으로(13)
필자는 ‘나 홀로 자유여행’으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80일간의 유럽미술 여행’을 다녀왔다. 유럽 12개국의 주요 미술관과 거장들의 개별미술관 순례 경험을 바탕으로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모던 미술과 명작이야기’를 미술사적, 인문학적 견지에서 재조명해본다. 지금까지는 15세기 이후 르네상스, 매너리즘 미술에 이어 17~18세기의 바로크, 로코코 미술, 18~19세기의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미술을 살펴보았다. 미술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중세의 붕괴로 신 중심의 미술은 인간중심의 르네상스 미술로 전환되었으며, 종교개혁과 대서양 시대는 유럽의 세력 판도와 미술의 지형을 바꿔놓았다. 구교국가이면서 르네상스를 꽃피운 이탈리아, 대항해시대 해양 강국인 스페인, 절대왕정 국가인 프랑스, 신교국가이면서 신흥 해상강국인 네덜란드는 각국이 처한 상황에 따라 교황, 국왕, 귀족, 시민 계급 중심의 미술을 구현했다. 18~19세기 프랑스대혁명, 산업혁명으로 유럽은 근대사회로 전환되었으며, 이 시기에 나타난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미술은 이성, 감성, 현실이라는 본질을 강조하면서 근대미술의 지평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들어 약 500년간 지속된 ‘고전미술’은 균열, 해체, 붕괴로 이어지면서 종언을 고하고, ‘코페르니쿠스’적 전환기를 맞이한다. 이제 인상주의 미술에 이어 나타난 후기 인상주의 미술을 살펴본다.
후기 인상주의(Post-Impressionism) 미술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쳐 프랑스에서 나타난 미술사조다. 인상주의 미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였지만, 르네상스 이후 약 500년간 지속된 고전미술의 문법에 마침표를 찍고 회화의 언어를 새로 쓴 미술이었다. 즉, 모더니즘의 서막이었다. 빛과 순간의 인상을 포착하는데 집중한 인상주의가 보는 방식을 바꾼 ‘시각 혁명’이었다면, 후기 인상주의는 보이는 것 너머의 세계를 어떻게 그릴 것인가? 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혁신’이며 전환’이었다. 16세기 폴란드의 천문학자인 코페르니쿠스는 천동설(지구 중심의 우주관)을 뒤엎는 지동설(태양 중심의 우주관)을 제기했다. 이는 인간의 존재, 우주의 구조, 신 중심의 세계관을 흔들면서 근대과학과 철학의 문을 열었다. 후기 인상주의도 ‘재현’의 고전미술’을 흔들면서 ‘표현’의 모더니즘 미술의 문을 연 것이다.
그렇다. 후기 인상주의의 후기(Post)는 단순히 인상주의의 ‘다음’이나, ‘이후’가 아니었다. 인상주의를 넘어서 회화의 규범을 새롭게 쓰려는 혁신의 흐름이었다. 그 흐름 속에서 신(Neo)인상주의가 후기(Post) 인상주의보다 앞서 나타났고 야수파, 입체파, 표현주의 미술은 뒤이어 나타났다. 쇄라, 시냐크 등이 추구한 신인상주의는 인상주의의 연장선상에서 빛과 색채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시각화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고흐, 고갱, 세잔 등의 후기 인상주의는 인상주의를 넘어 인간 내면의 감정, 상징, 구조를 표현하는 철학적이며, 조형적인 실험이었다. 즉, 차원이 다른 미술이었다. 그렇기에 신인상주의도 인상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후기 인상주의의 일부로 보기도 한다. 이렇게 후기 인상주의는 감각적 재현을 목표로 한 인상주의를 넘어 회화의 본질과 표현을 확장한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
후기 인상주의는 벨에포크 황금기의 실험적 미술
후기 인상주의는 1910년 영국의 큐레이터 겸 비평가인 로저 프라이가 런던의 한 화랑에서 “마네와 후기 인상주의자들”이라는 제목하에 고흐, 고갱, 세잔 등의 작품을 전시하고, 새로운 실험을 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라고 소개하면서 사조로 정착된 것이다. 사실 거장들은 자신들이 후기 인상주의 그림을 그린 것인지 알지 못했다. 고흐, 고갱은 물론 세잔도 이미 1906년에 죽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후기 인상주의 미술은 1886년에서 1905년에 걸쳐 나타났다. 1886년은 인상주의 그룹전이 제8회로 마감한 해였으며, 1905년은 야수파, 입체파 등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해였다. 모두 1871년 제3 공화국 이후 1914년 제1차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파리의 ‘벨 에포크(Belle Époque, 아름다운 시대)’ 시기에 나타났다. 에펠탑 건설(1889년), 파리만국박람회(1900년) 개최도 그렇지만, 카페, 샹송, 패션 등도 벨 에포크의 상징이었다.
그렇다. 파리는 약 40년간 모든 것이 잘나가던 전성기였다. 벨에포크는 인상주의-후기 인상주의-야수파, 입체파로 이어지는 모더니즘의 무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활동한 고흐, 고갱, 세잔, 쇠라 등은 하나의 통일된 그룹이 아니었다. 주제, 기법, 스타일이 각기 다른 전환기의 예술가였다. 그렇다. 각자의 주관적 자율성에 따라 실험적인 미술을 추구한 것인데 로저 프라이에 의해 함께 묶이고, 연이은 비평과 함께 마케팅되면서 사후에 우뚝 서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시대의 거울이 만든 ‘회화의 산맥’이라기 보다는 화가 각자가 세운 ‘회화의 봉우리’였다. 이제 인상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내면적, 철학적, 구조적인 회화를 추구한 후기 인상주의 미술의 내면을 살펴본다.
몽마르트르는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미술이 잉태된 전초기지
필자는 지난해 6월 11일부터 21일간은 파리의 오르세, 오랑주리 미술관, 몽마르트르, 고흐가 활동한 아를, 생레미, 오베르, 세잔이 활동한 엑상프로방스 등을, 8월 6일부터 11일간은 네덜란드의 반고흐, 크륄러 밀러 미술관 등을 방문하면서 후기 인상주의 미술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오르세미술관’ 5층은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미술을 집대성한 성전이었다. 서쪽 끝방의 고흐, 고갱, 중앙의 인상주의, 동쪽 끝방의 세잔, 쇠라 등의 명작을 쭉 이어서 비교 감상할 수 있어서 편리했다.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은 전 세계 유일의 고흐 전용 미술관이다.
200여 점의 회화, 드로잉, 편지 등을 통해 고흐의 일생을 엿볼 수 있었다. ‘크륄러 밀러 미술관’은 독일인 여성(실업가 부인)이 고흐의 작품에 매료되어 수집한 90여 점을 국가에 기증하여 설립한 미술관이다. 대단한 여성이다. 국립공원 내 숲속에 야외조각공원과 함께 있어 힐링이 되었다. 교통 사정이 좋지 않아 찾아가느라 고생했지만, 말로만 듣던 작품들을 보게 되어 보람이 있었다. 고흐가 예술공동체를 꿈꾸었던 아를, 생레미 정신병원, 밀밭에서 생을 마감한 오베르는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의 장면들이 생각나 가슴이 저렸다.
파리의 몽마르트르는 ‘예술가들의 언덕’이다. 화가들의 성지고, 보헤미안 예술의 상징이며, 모더니즘의 실험실이었다. 벨에포크 시기의 파리 시내와 비교하면 몽마르트르는 ‘산동네’, ‘달동네’였다. 임대료가 싸고 자유로운 분위기로 예술가들이 몰려들었다. 초창기의 고흐, 고갱, 세잔도 그곳을 거쳐 갔다. 언덕 정상의 사크레쾨르 대성당 옆 ‘화가들의 광장’, 주변의 주점, 카페들은 거장들도 방황하면서 예술혼을 불태웠던 장소였을 것이다. 언덕에서 내려오면 고흐가 동생 테오와 함께 살았던 ‘고흐의 집’, 지금은 사라졌지만, 인상주의 화가(바티뇰 그룹)들의 아지트였던 카페 ‘게르브아’, 후기 인상주의 화가이면서 포스터 그림의 선구자였던 툴루즈 로트렉이 쇼걸들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렸던 ‘물랭루주’도 언덕 바로 아래 동네다. 이렇게 몽마르트르는 예술가들의 교류공간이면서 아방가르드 미술의 전초기지였다.
고흐의 ‘아를의 침실’은 예술가 공동체를 꿈꾸는 이상향의 상징
이제 후기 인상주의의 3대 거장인 고흐, 고갱, 세잔의 작품을 살펴본다. 파리는 벨에포크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유럽의 미술 수도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빛과 그림자처럼 벨에포크와 등져있었다. 그림이 시대를 너무 앞서갔기 때문이다. 결국 고흐는 남프랑스의 아를로, 세잔은 엑상프로방스로, 고갱은 타히티로 빛과 순수한 색채를 찾아 떠난다. 태양과 빛은 그들에게 희망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은 냉혹한 현실과 빗나갔고 사후에야 빛을 보게 된다.
고흐가 예술공동체를 꿈꾸고 고갱을 초청해서 아를에서 9주간 동거하다 결별한 것 외에는 그들 사이에 특별한 교류는 없었다. 모두 서로 다른 철학과 감성을 가진 ‘고독한 별’이었다. 한마디로 생전에는 각자도생이었고, 사후에야 ‘불후의 별’들이 된 것이다. 출생은 세잔-고갱-고흐 순이나, 사망은 고흐(37세)-고갱(54세)-세잔(67세) 순이다. 그 가운데 드라마 같은 삶을 살다 요절한 고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이기에 먼저 살펴본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네덜란드 남부의 한 작은 마을에서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6세 때 숙부의 소개로 헤이그의 한 화랑과 파리, 런던지점에서 일하면서 미술 세계를 접했다. 후에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회자가 되고자 했으나, 중도에 포기하고 동생 테오의 권유로 암스테르담 미술 아카데미에서 미술을 배운 후 27세부터 화가의 길을 걸었다. 처음에는 밀레에 심취해서 농민 화가가 되려 했으나, 파리에 와서는 인상주의 영향으로 화풍이 밝게 변했다.
그러나 고흐의 삶은 불꽃처럼 짧았다. 불과 10년 동안 860여 점의 그림을 그렸지만, 살아생전에는 ‘붉은 포도밭(1888)’ 단 한 점밖에 팔지 못했다. 가난, 불안, 자살로 점철된 그의 삶은 그야말로 ‘비극의 아이콘’이었다. 하지만 사후에 그의 작품은 사람들의 마음을 조용하게 파고들면서 ‘비운의 화가’로 신화가 되었다. 그렇게 사후에 빛을 본 고흐는 ‘별이 빛나는 밤’, ‘해바라기’, ‘밤의 카페 테라스’, ‘까마귀가 나는 밀밭’ 등의 명작을 남겼다.
반고흐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아를의 침실(1988)’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그림 1). 1888년 고흐가 ‘예술가 공동체’를 꿈꾸고 아를로 이주해서 살았던 자신의 침실을 그린 것이다. 같은 해 작품으로 ‘노란 집’은 그 침실이 있었던 하숙집이고,‘ 고흐의 의자’는 자신의 방, ‘고갱의 의자’는 고갱이 9주간 머물렀던 방의 의자를 그린 것이다. 그해 말 고흐가 고갱과의 싸움 끝에 자신의 귀를 자르고 난 뒤 바로 그린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도 그 집에서다.
아를의 침실은 평면적 구성, 강한 원색의 보색대비, 불균형적인 구조는 고흐의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암시한다. 벽에 걸린 그림, 기울어진 침대, 열린 창, 두 의자 등의 오브제도 불안 심리의 이중적 표현이다. 침실의 풍경이 마치 정물화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단순한 침실의 풍경을 넘어 예술가 내면의 감성과 이상적인 삶을 시각화한 것이다. 이러한 고흐의 시각과 감성은 표현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고흐 자신은 이 작품에서 편안함, 고요함을 표현했다고 한다. 예술공동체의 이상향을 꿈꾸면서 내적안정을 바라는 고흐의 순수한 바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림에서는 그의 우울하고 불안한 심리가 드리워져 있다. 아쉽게도 그 침실이 있었던 ‘노란 집’은 2차대전 중 폭격으로 파괴되어 소실되었고 기념 표석만이 쓸쓸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고갱의 ‘타히티의 여인들’은 상징주의적 원시주의 미술의 정수
고갱도 인상주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한 화가였다. 그는 보헤미안의 자유를 꿈꾸었지만, 빈곤, 고립, 질병(심장병, 매독), 자살 시도 등으로 삶 자체는 험난했다. 파리-부르타뉴-마르티니크-아를-타히티-마르키즈제도에서 생을 마치기까지의 인생 행로가 말해준다. 그러나 그는 죽기 전까지도 예술적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예술의 혼’이 그를 버티게 해준 것이다. 그림 제목이 그의 삶을 시사하듯 고갱은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황색의 그리스도’,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등의 명작을 남겼다.
폴 고갱(1848~1903)은 파리에서 언론인 아버지와 페루의 귀족 가문 혈통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어렸을 때는 외가와 함께 페루 리마에서 살았다. 이는 고갱의 예술에 문화적, 감성적 토양이 되었다. 젊은 시절에는 증권 중개인으로 덴마크 여성과 결혼, 5명의 자녀를 두면서 안정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부르주아적 삶에 회의를 느끼던 차 1883년에는 증권 일을 그만두고 화가가 되기로 한다. 숨어있던 야성적 기질이 발동한 것이다. 그러나 고독과 가난은 그를 따라다녔다. 아를에서 고흐와 결별한 후에는 자신만의 원시 예술을 추구하기 위해 타히티로 떠난다. 그곳이 자신의 유토피아라고 생각한 것이다.
오르세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타히티의 여인들(1891)’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그림 2). 정원에 앉아있는 두 명의 타히티 여인을 그린 것이다. 한 여인은 생각에 잠겨있고, 다른 한 여인은 관객과 대면하는 시선이다. 평면적이고 원색적인 색 면 처리는 상징주의적 특징이고, 인물과 몸의 뚜렷한 윤곽선은 우키요에의 영향과 후기 인상주의적 특징이며, 두 여인의 서로 다른 시선은 원시적 고립감, 여성성을 신비화한 원시주의적 특징이다. 타히티의 현실은 이미 서구화, 상업화되어 고갱의 환상과 달랐으나, 타히티에 도착 직후 마음속에 그렸던 원시적 평온을 그린 것이다.
그림에서 한 여인은 고갱이 함께 동거했던 13세의 현지 여성인 ‘테하마나’라고 한다. 고갱이 명백히 밝힌 적은 없지만, 머리에 꽃을 꽂고 전통의상을 입은 앞의 여성으로 추정한다. 법적인 결혼은 아니지만, 동거(사실혼)하면서 자신의 뮤즈로 삼은 것은 아동학대며, 식민주의적 여성 착취였다. 죽기 전에 고갱은 자신의 무덤 비석에 ‘Savage (야만인)’로 새겨달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본능과 예술에 충실한 야만인이 되기를 원했던 그의 마지막 고백이었는지, 일말의 참회였는지 알 수는 없다.
세잔의 ‘사과와 오렌지’는 철학이 응축된 후기 인상주의 미술의 진수
세잔은 생전에 후기 인상주의라는 이름도 몰랐으며, 멘토이면서 친구였던 피사로의 소개로 인상주의 그룹전에 참가한 적은 있지만, 그들과 거리감을 느끼면서 독자적인 길었다. 그는 화가로서 평생 고독한 삶을 살았지만, 끊임없는 실험을 통해 ‘균형’, ‘조화’, ‘안정’의 고전미술을 ‘형태’, ‘구조’, ‘질서’의 언어로 바꾸었기에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불린다. 인상주의의 한계를 넘어 회화를 ‘지속 가능한 예술’로 만든 것이다. 사진의 발명으로 흔들렸던 미술이 인상주의로 정체성을 찾았다면, 세잔은 모더니즘의 조형적, 철학적 기반을 세운 혁신가였다. 그렇기에 피카소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고 칭송했다. 만일 세잔이 없었다면 야수파도, 입체파도 없었을 것이다. 세잔이 씨를 뿌렸다면, 수확은 마티스와 피가소가 거둔 셈이다.
폴 세잔(1839년~1906)은 남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에서 은행 공동창업자의 아를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후에 법대에 진학했으나 흥미가 없어 중퇴하고 동네 절친이었던 에밀 졸라의 권유로 파리로 이주한 후 화가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국립미술학교, 살롱전, 낙선 전, 인상주의 전시회(2번) 등 하는 것마다 좌절의 연속이었다. 1880년대 초에는 파리 생활을 정리하고 프로방스로 낙향한다. 56세의 늦은 나이지만 1895년의 첫 개인전은 화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고독한 은둔생활은 지속되었다. 1901년 엑상프로방스 북쪽 언덕에 아틀리에를 지은 후 1906년 사망할 때까지는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며 여생을 보냈다. 엑상프로방스는 태양 빛이 작열하는 곳이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 아틀리에는 ‘세잔의 해 2025’ 개관을 목표로 대수리 중이라 아쉽게도 그의 창작공간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세잔의 길’을 따라 올라간 ‘세잔의 언덕’에서는 그가 멀리 보이는 ‘생트 빅투아르 산’을 수백 번씩 그리면서 자연을 원기둥, 구, 원뿔 등 기하학적으로 환원하려 했던 고뇌를 느낄 수 있었다.
세잔은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 ‘붉은 조끼를 입은 소년’, ‘대 수욕’ 등 외에도 특히 생트 빅투아르 산(80여 점)과 사과 (12점)를 많이 그렸다. 아마도 2개의 제재에 꽃 혀 스튜디오에서는 ‘사과’, 야외에서는 ‘산’을 주로 그린 것 같다. 오르세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사과와 오렌지(1895~1900)’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그림 3). ‘세계를 바꾼 3개의 사과’라는 비유가 있다. ‘이브의 사과’, ‘뉴턴의 사과’, ‘세잔의 사과’를 두고 하는 말이다. 세잔의 사과가 미술사를 바꾸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작품은 단순히 사과와 오렌지를 그린 정물화가 아니다. 정물을 조형적으로 실험한 그림이다.
그는 사과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관찰했다. 경사진 테이블, 원근법을 무시한 사과, 오렌지, 접시를 바라보는 복수의 시점, 과감한 색상의 평면적 처리는 세잔이 사유한 방식대로 그린 것이다. 한마디로 철학이 응축된 그림으로 후기 인상주의 회화의 진수라고 하겠다. 세잔은 “나는 고독을 사랑한다. 그러나 고독 속에서만 살아야 하는 운명은 슬프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30년간 절친이었던 에밀 졸라가 자신의 소설 ‘작품’에서 세잔을 실패한 화가로 그려 절교했지만, 그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다. 그렇다. 세잔은 평생 고독한 화가였으나, 20세기 현대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준 ‘한 알의 밀알’이었다.
후기 인상주의는 회화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철학적 사고의 전환
이렇게 후기 인상주의는 회화의 중심이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이동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며, 철학적 사고의 전환이었다. 즉, 회화의 언어를 새로 쓰는 코페르니쿠스적 혁신이며, 전환으로 모더니즘의 서막이었다. 내면적 감정의 시각화, 상징적 색채와 원시성, 형태의 기하학적 구조화 등은 야수파, 입체파, 표현주의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여기서 후기 인상주의 미술은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첫째, 아방가르드적 혁신이었던 르네상스 이후 약 500년간 지속된 고전미술의 규범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낭만주의-사실주의-인상주의를 거치면서 균열을 일으킨 고전미술은 후기 인상주의에서 해체 수준에 이른 것이다. 둘째, 모더니즘의 서곡인 인상주의는 ‘도랑이 파이면 물이 흐르고, 모여진 냇물은 강이 되고, 바다가 되듯이’ 모더니즘의 서막인 후기 인상주의에 이르게 되었다. 즉, ‘재현(representation)’을 넘어 ‘표현(expression)’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셋째, 위대한 시대를 연 것은 혁신적인 예술가들의 자율성이었다. 고흐는 표현주의, 야수파, 고갱은 야수파, 상징주의, 세잔은 야수파, 입체파, 미래파 등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제 후기 인상주의 미술은 20세기 초 정신적 격변기 속에서 인간 내면의 본능과 감각의 자유를 색채로 분출시키는 야수파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었다.
정광균 칼럼니스트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제19회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주토론토 총영사와 주이집트 대사를 역임하며 외교 현장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외교관 은퇴 후에는 학문의 길로 전환하여, 한양대학교 관광학과에서 DMZ 관광개발과 관광자원 분야를 연구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남서울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객원교수와 한양대학교 관광학과 및 국제관광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교육자로서도 활동했다. 현재는 추계예술대학교 대학원 문화예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서양미술사 분야의 학위를 준비 중이다. 동시에 한국미술협회 산하 일원회와 현대사생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화가로서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필자는 외교관으로서의 국제적 시각, 관광학 전문가로서의 학술적 접근, 현장 예술가로서의 실제적 안목, 서양 미술사 연구자로서의 전문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러한 다면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단순한 여행기나 미술사 해설을 넘어서는 심도 있는 연재를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