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국 연대 ‘제3의 길’ 찾아라”
카니 총리 “세계질서 단절 국면… 패권국의 거짓 팻말 내릴 때”
기원전 5세기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그리스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델로스 동맹을 축으로 하는 해상세력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뭉친 육상세력 스파르타가 충돌하고 있었다. 에게해 남부 키클라데스 제도에 멜로스라는 도시국가가 있었다. 멜로스는 어느 동맹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을 표방했다. 그러나 막강한 해군력으로 에게해를 제패했던 아테네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아테네군이 멜로스 섬으로 들이닥쳤다. 멜로스는 보편적 선과 가치와 정의를 호소했다. 그러나 아테네는 오로지 힘의 논리를 들이댔다.
“인간관계에서 정의란 힘이 대등할 때나 통하는 것이다.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관철하고, 약자는 거기에 순응해야 한다.”
정녕 역사는 되풀이 되는 것인가? 고대 그리스 역사의 장면들이 현대사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미국의 패권 앞에 보편적 가치를 기반으로 한 국제질서가 휴지조각처럼 버려지고 있다.
미국 패권 정책 정면 비판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가 투키디데스의 ‘필로폰네소스 전쟁사’까지 언급하면서 미국의 폭력적 패권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카니 총리는 지난 20일(현지시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의 특별연설을 통해 “세계 질서의 단절”과 “새로운 질서의 구축”을 거론했다. 그는 “강대국 중심의 지정학이 어떠한 한계도,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은 채 작동하고 있다”면서 미국을 직격했다. 중견국들의 연대를 통해 패권국이 강요하는 종속을 거부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카니 총리는 이날 도널드 트럼프 미국대통령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트럼프 대통령의 면전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혹은 ‘임금님은 벌거숭이’라고 외친 것이었다. 마디마디 그의 연설은 단호하고 강렬했다. 핵심 메시지를 중심으로 그의 연설을 정리해보자.
# “거짓의 팻말을 내려라.” 체코의 반체제 인사였던 바츨라프 하벨은 1978년 ‘힘없는 자들의 힘(The Power of the Powerless)’ 이라는 에세이를 썼다. 훗날 체코 대통령이 되는 하벨은 이 글에서 그는 아주 단순한 질문을 던진다. “공산주의 체제는 어떻게 스스로를 유지했는가?” 하벨은 한 채소 가게 상인에게서 그 답을 찾는다. 상인은 매일 아침 가게 창문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문구가 적힌 팻말을 내건다. 상인은 이 말을 믿지 않았지만, 문제를 피하기 위해, 순응하고 있음을 표시하기 위해, 그저 무난하게 살아가기 위해 그 팻말을 내건다.
모든 거리, 모든 가게의 상인들이 똑같이 행동하기 때문에 그 체제는 지속된다. 그런 거짓 체제는 폭력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거짓임을 알면서도 반복적으로 의식에 참여함으로써 그 체제가 유지된다. 하벨은 이를 ‘거짓 속에서 살아가기(living within a lie)’라고 불렀다.
지난 수십년 동안 미국 패권 중심의 국제질서가 작동을 해 왔다. 그 질서는 부분적으로 거짓이었고, 비대칭적이었다. 그러나 그 아래서 세계는 평화와 번영을 이루었다. 그래서 우리는 창문에 (미국이 내미는) 팻말을 내걸었다. 그러나 이런 거래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이제는 그 팻말을 내려야 할 때다.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연기를 멈추는 순간, 그 환상은 금이 가기 시작할 것이다.
# “중견국은 무력하지 않다.” 강대국 중심의 지정학이 어떠한 한계도,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은 채 작동하고 있다. 캐나다와 같은 중견국(intermediate powers)들은 결코 무력하지 않다. 중견국들은 인권 존중과 지속 가능한 발전, 연대, 주권, 그리고 각 국가의 영토 보전 등 우리의 가치를 포괄하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할 역량을 지니고 있다. 투키디데스의 경구대로 강자는 압박하고, 약자는 순응하려 한다. 국가들이 분란을 피하고, 문제를 만들지 않으며, 복종이 안전을 보장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한다.
# “가치 기반 현실주의로 접근하자.” 지리적 조건과 동맹 가입이 자동으로 번영과 안보를 보장해 주는 시대는 지났다. 캐나다는 원칙적이면서도 실용적인 국가가 되고자 한다. 우리의 새로운 접근법은 ‘가치 기반 현실주의(value-based realism)’에 기반하고 있다. 핀란드 대통령 알렉산더 스텁이 말한 개념이다. 캐나다는 전략적으로 폭넓게 세계와의 관계를 재조정하고 있다. 유럽연합(EU)과는 유럽 방위 조달 체계(SAFE) 참여를 포함한 포괄적 전략적 파트너십에 합의했다. 지난 6개월 동안 4개 대륙에 걸쳐 12건의 무역 및 안보 협정을 체결했다. 지난 며칠 사이 중국과 카타르와의 새로운 전략적 파트너십을 마무리했다. 현재 캐나다는 인도와 동남아국가연합(ASEAN), 태국, 필리핀,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MERCOSUR) 등과 자유무역협정(FTA)을 협상 중이다.
# “힘있는 ‘제3의 길’을 만들자.” 중견국들은 반드시 함께 행동해야 한다. 양자 협상만 한다면, 중견국들은 패권국이 제시하는 조건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주권을 수행하는 척하면서 종속을 받아들이는 행위다. 중견국들끼리 연합해야 한다. 힘있는 ‘제3의 길’을 구축해야 한다. 이제 창문에 걸린 거짓 팻말을 내려야 한다. 낡은 질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이 균열로부터 더 크고, 더 좋고, 더 강하고, 더 정의로운 무언가를 구축할 수 있다.
강대국들은 그들만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도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가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 현실을 있는 그대로 명명할 수 있는 용기, 국내에서 우리의 힘을 키울 수 있는 역량, 그리고 함께 행동할 수 있는 의지를 지니고 있다.
‘멜로스 화두’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2026년 새해 벽두에 카니 총리가 세계에 ‘멜로스 화두’를 던졌다. 나홀로 저항하다가 무너질 것인가, 거짓 팻말을 내걸고 굴종할 것인가, 연대를 통한 ‘제3의 길’을 모색할 것인가. 카니 총리는 당장 트럼프 대통령의 반격에 직면했다. 발끈한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주도하고 있는 ‘가자지구 평화위원회’ 초청대상에서 카니 총리를 빼 버렸다. 또한 캐나다가 대 중국 무역 협정을 계속 추진할 경우 캐나다에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위협까지 얹었다. 그러나 여론은 카니 총리 편이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28일 카니의 연설 직후 카니와 트럼프의 지지도가 정 반대의 반응을 나타냈다고 보도했다. 캐나다의 비영리 여론조사 기관인 앵거스 리드 연구소(Angus Reid Institute)가 26일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카니 총리에 대한 캐나다 국민의 지지도는 8%포인트 오른 60%를 기록했다. 그가 지난해 3월 총리직에 오른 이후 최고치다. 같은 날 발표된 로이터・입소스 여론조사에 따르면, 트럼프의 국정 수행 지지도는 3% 포인트 떨어진 38%로 나타났다. 이는 그의 두 번째 임기 시작 이후 최저 수준과 타이를 기록한 것이다.
미국의 저명 언론인인 제임스 팰로스는 22일 ‘브레이킹 더 뉴스(Breaking the News)’라는 매체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세계속 미국의 위치에 대해 기억에 남을 담론을 남겼다”라면서 “역사책에 실릴만한 연설”이라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뉴욕타임스와 파이낸셜타임스, 이코노미스트, 가디언 등 세계 언론들도 '중견국 연대'라는 개념에 주목하면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놨다.
자못 도발적인 카니의 ‘중견국 연대’와 ‘제3의 길’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한국은 종합 국력 세계6위의 중견국이다. 지난 2022년 12월 미국 시사주간지 ‘US뉴스&월드 리포트’가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들(Most Powerful Countries)’ 순위에서 한국은 세계 6위에 올랐다. 프랑스와 일본까지 각각 7위와 8위로 밀어낸 놀라운 결과였다.
이재명 대통령이 강조해 온 국익 중심 실용외교도 카니 총리가 언급한 ‘가치 기반 현실주의’와 맥락이 닿는다. 더군다나 최근 한국과 캐나다는 잠수함과 자동차, 배터리 등 핵심 산업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고위급 특사 교환을 통해 경제안보·공급망 협력까지 포괄하는 중견국 간 실질 협력이 빠르게 진전되고 있다. 과연 우리가 중견국 연대에 힘을 보탤 수 있을까? 창문에 걸린 거짓 팻말을 내린 뒤 ‘제3의 길’이라는 새 팻말을 내걸 수 있을까? ‘종속된 안전’ 대신 ‘연대를 통한 주권’을 확보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