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행정통합 본질, 국가 운영방식 바꾸는 것
행정통합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대전과 충남, 광주와 전남, 부산·울산·경남까지 논의 범위도 전국적이다. 인구 감소와 재정 고갈, 지방소멸이라는 위기 앞에서 ‘합치는 것’이 하나의 해법처럼 제시된다.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일정한 공감대가 형성된 점도 이례적이다. 그러나 통합을 둘러싼 질문은 여전히 계속된다. 통합이 지방의 위기를 넘는 해법이 될 것인지, 아니면 또 하나의 형식적 재편에 머무를 것인지 등이다.
한국의 행정통합 논의는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조선 후기 군·현 통폐합에서부터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1990년대 도농통합과 이후의 광역화 논의까지 통합과 분리는 반복돼 왔다. 결과는 비슷했다. 기대는 컸지만, 통합이 지방의 자율과 경쟁을 실질적으로 강화했다는 이야기는 찾기 어렵다.
통합은 왜 늘 위기 속에서 등장했는가
반복된 역사에는 일관된 맥락이 있다. 효율과 절감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중앙권력이 지방권력을 관리·통제하기 쉬운 구조를 만드는 데 열을 올렸다는 것이다. 지방의 역량을 키우기 위한 전략이라기보다 국가가 지방을 다루는 방식을 재정렬하는 수단에 가까웠다. 이 과정에서 지방의 자율성은 통합의 출발점이 아니라 ‘기대 효과’ 수준에 머물렀다.
이번 행정통합 논의는 과거와 다른 조건 위에 서 있기는 하다. 인구 감소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 추세로 굳어졌고 지방 재정의 취약성 역시 개별 지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 설계의 한계로 드러나고 있다. 중앙정부 또한 기존 방식으로는 전국을 관리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조건 속에서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5극’ 혹은 ‘5대 권역’ 구상이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의 권역별 성장 전략, 오세훈 서울시장이 언급한 ‘5개의 싱가포르’ 현 정부의 ‘5극3특’ 구상은 모두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 대목에서 행정통합의 본질을 다시 물어야 한다. 핵심은 통합 여부가 아니라 통합 이후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행정구역의 크기를 키우는 것만으로 지방의 위기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중앙에 종속된 권한이 그대로인 통합은 지자체의 덩치만 키울 뿐이다.
권한 없는 통합은 지방의 자율을 강화하기보다 되레 중앙 전략을 실행하기 쉬운 구조만 강화될 수 있다는 우려마저 제기된다. 해외 사례는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독일은 비교적 작은 주 단위를 유지하면서도 강한 권한을 부여해 기능 분산과 내부 경쟁을 병행한다. 프랑스는 통합과 분화를 반복하며 행정 효율과 정치적 관리 사이의 균형을 조정해 왔다. 일본의 ‘헤이세이 대합병’은 행정 효율을 일정 부분 끌어올렸지만, 지역 정체성과 경쟁력을 약화시켰다는 평가도 뒤따른다. 행정통합의 성패가 규모가 아닌 권한 설계에 달려 있다는 점이 이들 사례에서 확인된다.
통합 이후의 경쟁 구조 또한 간과할 수 없다. 통합이 곧 획일화를 의미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내부 기능 분화와 건전한 경쟁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통합은 활력을 잃기 쉽다. 한반도의 역사 역시 이를 보여준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하나의 정치체로 묶여 있지 않았지만 경쟁과 교류 속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번성했고 동아시아 질서에 영향을 미쳤다. 오늘의 행정통합 역시 안정 추구만이 아닌, 통합 이후에도 경쟁과 자율이 작동할 수 있는 구조를 남길 수 있는지 점검이 필요하다.
문제는 통합의 형식이 아닌 내용
한국에서 ‘통합’은 언제나 위기의 언어로 등장해 왔다. 조선 후기 군·현 통폐합, 1995년 지방자치 부활 이후의 광역화, 그리고 현재의 인구 감소·재정 고갈·지방소멸 위기까지 모두 비슷하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통합 논의를 관통해 온 속내다. 중앙권력의 지방 통제 필요성이 우선됐다는 점이다. 이번 행정통합 논의 역시 내용보다 형식에 치중할 경우 기존 통합의 답습 혹은 지방선거를 앞둔 판 흔들기라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행정통합은 지방을 관리하는 방식의 조정이 아니라 국가 운영 방식의 변화로 나아가야 한다. 이번 논의가 군·현 통합 등 행정구역 개편에는 성공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난 1894년 갑오개혁의 현대판으로 남을지, 아니면 대한민국 도약의 전환점을 마련한 가칭 ‘2026년 병오개혁’으로 평가받을지는 지금의 결단에 달려 있다. 재정권, 규제 결정권, 산업·인허가 권한 등 실질적 권한을 어디까지 지방에 이관할 것인지가 그 가늠자가 될 것이다. 중앙이 무엇을 내려놓을 준비가 돼 있는지, 그것이 이번 행정통합 논의의 본질이다.
이제형 자치행정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