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진단
미국 세기의 종언과 전환기 한국의 생존 전략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약 80년간 세계 질서를 지탱해온 ‘미국 세기(American Century)’가 막을 내리고 있다. 과거 미국은 스스로를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수호자이자 ‘규칙 기반 질서’의 관리자로 규정하며 그 비용을 감당해왔다.
그러나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출범은 미국의 ‘아틀라스(Atlas)적 역할’이 완전히 끝났음을 선포했다. 작년 12월초 공개된 미국의 국가안보전략(NSS: National Security Strategy)의 핵심 요지다. NSS에 따라 미 국무부의 전략계획(ASP: Agency Strategic Plan)과 국방부의 국방전략(NDS: National Defense Strategy)이 최근 공개됐다.
과거와 크게 다르다. 첫째, ‘돈로 독트린’이다. 미국 본토 및 서반구 방어를 최우선으로 격상했다. 중국 억제는 2순위다. 둘째, 동맹의 역할 재정의다. 동맹국들의 방위비 분담과 역할 확대를 강하게 요구한다는 얘기다. 셋째, 경제와 안보의 결합이다. ‘미국의 재산업화’와 ‘무역 불균형 해소’가 외교 전략의 핵심 목표다.
동맹의 질적 변이: 규범에서 힘으로
국제정치학계에서는 동맹의 성격이 ‘질적으로’ 변이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철저한 미국 우선주의다. 미국은 더 이상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의 리더가 아니다. ‘힘에 의한 평화’를 위해 베네수엘라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고 그린란드 병합을 추구하는 나라다. 동맹은 미국의 경제적 결손을 메우고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거래의 대상’이자 ‘비용 전가의 통로’다.
첫째, 규범적 정당성의 붕괴다. 유일한 잣대는 ‘힘’과 ‘거래 가능성’이다. 둘째, ‘부담 공유’에서 ‘부담 이전’으로의 변환이다. 앞으로 방위비 분담(SMA)은 미국의 재정 적자를 동맹국에 전가하는 ‘강압적 구조’다. 셋째, 중국은 당장 이념과 체제의 적은 아니지만 장차 압도적으로 눌러야 할 상대다. 경쟁과 동시에 거래 가능성도 확대된다. 넷째, 동맹의 등급화다. 한반도의 가치는 하락하고 있다. 유사시 한반도에 대한 자동 개입이나 확장억제 공약은 약해질 수 있다.
한국이 직면한 3대 구조적 딜레마
미국 우선주의로 한국은 세 가지 난제를 마주한다. 첫째, 비용-수익의 반비례 딜레마다.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할수록 한국의 국가 재정은 악화되고 산업 경쟁력은 약화된다.
둘째, 자율성-신뢰의 상충 딜레마다. 한국이 생존을 위해 제3의 길을 모색할 경우, 미국은 이를 ‘배신’으로 간주하여 보복을 가하려 할 것이다. 셋째, 안보-경제의 분절 딜레마다. 어느 한 편을 선택하는 순간 다른 한 축이 무너지는 제로섬 게임에 빠져든다. 1970년대 초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닉슨 대통령에게 남베트남의 응우옌 반 티우 대통령의 운명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적이 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지만, 미국의 친구가 되는 것은 치명적이다.” 자아비판이었다. 티우를 버리면 세계가 미국을 어떻게 보겠느냐는 얘기였다. 지금 미국은 전략 목표를 위해 동맹국을 이용하다가 언젠가는 냉정하게 돌아설 수 있음을 선명하게 시사하고 있다.
한국이 처한 구체적인 난관들
ASP와 NDS 보고서 전체를 관통하며 한국에 적용될 핵심 용어는 비용분담(방위비 증액), 안보 책임 전가(지역 안보의 주도적 비용과 역할은 동맹국 책임), 상호주의(경제와 안보에서 준만큼 받아낸다), 국익 우선주의(가치나 명분보다 미국의 실질적 이득을 우선) 등이다.
네 가지 우려다. 첫째, 한국은 안보 혜택에 대해 ‘공정한 가격’을 지불해야만 한다. 트럼프는 연간 100억 달러를 요구해 왔다.
둘째,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다. 한국은 미군의 발진기지가 되어 중국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북한 억제의 주된 책임을 한국에 두는 NDS에 대해 “자주국방은 기본”이라고 코멘트했지만, 정작 핵심은 주한미군의 유연성 문제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셋째, 대만 TSMC처럼 한국의 핵심 산업을 미국으로 편입시키려는 의지다. 소위 ‘미국의 재산업화’다. 넷째, 미국의 이익과 우리의 경제적 이해가 상충하는 상황이 도래한다. 중국과의 경제거래를 최소화하라는 요구다.
대한민국 외교의 대전환: 실천적 5대 제언
지난 주 다보스 포럼에서 캐나다의 마크 카니 총리는 분열하고 있는 현 국제질서를 가리키며 이렇게 강조했다. “통합이 예속의 근원이 되는 상황이라면, 통합을 통한 상호 이익이라는 거짓 속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다.” 한미동맹 관계가 우리에게 예속을 강요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면, 우리는 동맹이라는 미명으로 미국의 선의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가진 옵션이 제한되어 있다고 반박할는지 모른다.
물론 미국과 대화하고 협상해야 하겠지만 진짜 대한민국을 위해 대안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현실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말한다. “전적으로 타인에게 의존하는 군주는 반드시 몰락한다.”
첫째, 한미동맹은 국익을 위한 ‘상대적 도구’로 재정의해야 한다. 동맹의 유지비용이 효용을 초과한다면 과감히 동맹의 성격 전환이나 재설계를 검토해야 한다. 키신저의 경구를 상기하는 것도 좋다. ‘미국 우선주의’에 대항할 우리의 무기는 ‘대한민국 우선주의’다. 우리는 미국의 ‘머니 머신’이 아니다.
둘째, 중국 및 러시아와의 완전한 관계 복원이다. 중국에 대해서는 소위 ‘사드 3불’을 지지하면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반대 방침을 검토해야 한다. 둘 다 이 대통령이 이미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러시아에 대해서는 상호존중의 원칙을 확인하고 실질 경제협력을 위해 협의해 나아가야 한다. 북한과의 대화와 협력을 재개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셋째, 다극화 질서로의 편입이다. 변화하는 세계 질서에 적응하기 위한 ‘전략 보험’이다. 브릭스(BRICS)와 상하이협력기구(SCO) 가입을 검토해야 한다. 두 기구는 구매력 기준 GDP에서 이미 G7을 앞질렀다. 거대한 잠재 시장과 에너지 네트워크에서 고립되는 것은 자해행위가 될 수 있다.
넷째, 남북 관계의 주도적 복원과 ‘한반도 운전자론’ 재가동이다. ‘페이스메이커’도 좋지만 기회가 있다면 우리가 직접 ‘피스메이커’로 먼저 남북 관계의 돌파구를 열어야 한다. 군사훈련을 중단하고 전작권 회복을 가속화해야 한다. 과거 ‘한미 워킹그룹’처럼 미국의 승인만을 기다리다 기회를 놓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한반도의 평화는 우리 생존의 필수조건이다.
다섯째, 내부의 응집력 강화와 산업 안보 확립이다. 외교적 자율성은 강력한 국력에서 나온다. 국내 정치와 경제 기반을 강화해야 한다. 중산층 붕괴와 산업 공동화에 대한 대응 없이는 대외전략의 자율성도 확보될 수 없다. 미국 외교 전략가인 조지 케난은 “국내문제에 실패한 국가는 대외정책에서도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주권 국가 대한민국의 길
미국은 더 이상 선하기만 한 이웃이 아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동맹을 버릴 준비가 된 냉혹한 현실주의자로 변모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동맹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목적은 오직 ‘대한민국의 생존과 번영’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미국에만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길을 찾는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강자는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약자는 당해야 하는 일을 당한다.” 유명한 말이다. 하지만 당하는 것만이 약자의 운명은 아니다. 더군다나 대한민국은 약자가 아니다. 관성에서 깨어나 냉철한 눈으로 세계를 보아야 한다. 한미동맹의 재고는 감정적 결별이 아니라 전략적 재조정이고, 반미가 아니라 탈의존이다. 또 주권 국가로서 합리적 정책 선택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