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면기 칼럼

‘통일’ 유보한 실용주의, 평화 이룰 수 있을까

2025-07-15 13:00:02 게재

정권 교체 후 남북관계 진전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북한과의 대화와 협력 재개 의지를 적극 표명해온 만큼 지난 정권기의 거친 대치국면은 일단 숨고르기 국면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 취임 직후 우리 정부가 선제적으로 대북 확성기 방송과 대북전단 살포를 중지하자 북한이 이에 즉각 호응한 것도 이런 관측에 힘을 더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가 지속될지는 미지수지만 변화의 조짐이 감지되는 것만으로도 의미있는 진전이다.

남북관계에서 더욱 주목할 것은 지난 달 6.15 남북공동성명 25주년에 보낸 이재명 대통령의 축사다. 이 대통령은 ‘평화’ ‘공존’ ‘번영’하는 한반도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의지를 피력하면서도 ‘통일’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6.15 선언 정신을 온전히 이어가되 당장 실현이 어려운 통일이라는 목표보다는 남북한 간의 실질적 협력과 평화 달성에 노력을 집중해 나가겠다는 의중을 드러낸 것이다. 최근 통일부 명칭 변경논의 또한 정부가 통일 담론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는 기류를 잘 보여주고 있다.

분단 이후 우리 사회의 통일론은 민족주의적 당위, 역사의 복원, 분단의 비극 해소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왔다. 그러나 이런 서사는 한반도 국제정치의 변화와 북한의 핵무장 노선, 청년세대의 탈통일적 정서를 담아내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6.15 축사에서 ‘통일’이 빠진 까닭

통일에는 공감해도 시기와 방식을 둘러싼 이견이 크게 증가했다. 남과 북의 ‘역사적인’ 회담이 실질적 성과없이 끝나는 일이 반복되면서 통일에 대한 피로감이 누적돼 온 것도 사실이다. 더 큰 문제는 사회심리학에서 말하는 ‘기대 좌절 이론’의 함정이 작동하면서 좌절된 ‘희망’이 공격성으로 변질되어 맹목적 반북, 이분법적 반공주의를 강화시켜 왔다는 점이다. 2023년 말 북한이 내민 ‘두 개의 조선론’ 역시 북한판 좌절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남북이 모두 통일피로를 호소하고 있는 셈이다.

북한이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하고 나선 것은 흡수통일 견제용이라는 성격이 짙다. 윤석열정부가 자신을 ‘주적’으로 명시하고 9.19 군사합의의 효력을 정지한 것 등에 대해 체제붕괴를 꾀하고 있다고 반발한 것에서 이같은 불만이 드러난다. 북한이 남한을 적대국으로 규정하고, 남에서 북한 통일문제에 대한 갈등이 깊어지면서 상대방의 선의를 선뜻 믿을 수 없는 불신도 깊어졌다. 밀려오는 미중갈등의 파고는 과거 한반도에서 반복되었던 강대국 충돌의 위기가 재현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우리 생각만으로 타개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위험한 구조와 어설픈 감정이 결합하면 전쟁을 부른다. 대통령이 통일을 내려놓고 ‘싸울 필요가 없는’ 남북관계를 강조한 것은 이런 위험 요인들을 감안한 ‘전략적 전환’으로 풀이된다. 통일을 유보하더라도 평화를 통해 통일로 가는 길을 돌아가야 한다는 실용주의적 인식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리고 ‘사라진 평화’를 복원해 나가자. 이 대통령의 결의이며 호소다. 그러나 북한 통일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대통령의 전략은 성공을 담보하기 어렵다. 통일서사를 이념과 당위의 영역에서 우리가 직면한 냉엄한 역사현실의 시공으로 끌어내야 하는 난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통일교육의 혁파로 귀결된다. 통일을 ‘교육’한다는 관료주의적 방식도 고쳐야 하지만 내용체계도 일신해야 한다. 노장세대는 통일을 역사적 당위나 책무로 인식한다.

그러나 청년세대는 분단을 익숙한 체제로 수용하며 삶의 질이나 기후위기 등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세대간 인식의 단절을 극복하고,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현실 인식, 소통 가능한 미래상의 제시가 무엇보다 시급하다. 한반도 분단은 2차대전 후의 일회성 비극이라고 말하기 곤란한 측면이 있다. 한반도가 역사적으로 강대국 충돌의 공간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외면하면 통일논의가 고루한 냉전적 사고, 역사적 비관주의로 일탈할 공산이 크다. 국제정치적 현상에 대해 정확하게 평가하고 우리가 겪어온 역사를 깊이 호흡할 수 있어야 분단체제의 폭발성을 직시할 수 있게 된다.

통일의지 견인할 가치체계 다시 세워야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 이탈리아 사상가 그람시(Antonio Gramsci)의 말이다. 우리가 처한 조건을 냉철하게 진단하되 평화와 통일에의 의지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경구로 새길 만하다. 이재명 정부가 ‘통일’이라는 표현을 자제한 것을 포기나 후퇴로 단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남북이 통일에의 의지를 끊임없이 확인, 공유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하고 평화와 통일의 가치체계가 지속적으로 내면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현실과 지향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없으면 평화는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평화를 잃으면 통일과 번영이라는 궁극의 지향점도 다시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