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바람직한 주 4.5일제 설계 방향
주 4.5일제, 즉 주 36시간제는 이재명 대통령이 후보 시절 제시한 노동개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제도는 단순한 근로시간 축소가 아니라 일과 삶의 관계를 재정렬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노동시장을 둘러싼 현실도 바뀐 상황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원격 및 유연근무제가 확산된 상태이고, MZ세대를 중심으로 ‘일과 노동의 균형’ 요구가 일상화되어 가는 흐름이다. 이 정책은 포퓰리즘이거나 기업 현실을 모르는 정책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인구구조 변화와 산업전환에 대응하기 위해 노동시장 전체를 재설계해야 할 시점임을 알리는 상징적 정책이라 할 수 있다.
단순한 근로시간 축소 아닌 일과 삶의 관계 재정렬하려는 시도
해외 사례 역시 노동시간 단축이 구조적 과제임을 시사한다. 아이슬란드는 2015년부터 4년간 공공부문에서 36시간 근무제를 실험했고 결과는 생산성 향상, 서비스 품질 개선, 스트레스와 번아웃 감소였다. 단축된 시간에도 업무 수행 결과는 저하되지 않았고 조직 운영은 효율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에서는 2022년 민간기업 60여 곳, 근로자 약 3000명이 참여한 주 4일제 시범사업이 진행됐는데 이직률 감소, 업무 몰입도 향상, 높은 수준의 제도 만족도가 관찰된 바 있다. 북유럽 국가들 역시 마찬가지 측면에서 주목을 받는다. 이들은 유연근로시간제를 기반으로 한 복지제도와 교육훈련 인프라, 디지털 행정체계가 함께 작동하면서, 제도적 안정성과 국민 삶의 질이 동시에 높아졌다는 평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제한적이지만 유사한 실험들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 IT, 콘텐츠 등 창의성이 중요한 스타트업 기업이나 일부 대기업에서 시범적으로 도입이 이뤄진 바 있고 직무 만족도 향상, 이직률 감소, 생산성 증가가 관찰되었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다만 이 경우에도 근무시간을 줄인 데 더해 유연한 조직문화, 권한 부여, 성과 중심 업무 설계 때문에 가능했다는 평가가 많다. 업무의 질적 향상이 단축된 시간을 상쇄한 셈이다. 이러한 국내외 경험은 4.5일제에 대한 무조건적 비판보다 조직 설계와 노동문화의 변화를 포함한 폭넓은 검토가 더 중요한 과제임을 의미한다.
물론 한국 전체 노동시장으로 확대하면 상황이 만만치 않다는 점도 사실이다. 국내 제조업과 전통 서비스업의 다수는 상시 대응이나 현장밀착 업무 비중이 높고, 인력교대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2023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하위권인 33위에 그칠 정도로 여전히 낮다. 이처럼 낮은 생산성 하에서 노동시간을 줄일 경우에는 산출량 감소와 소득 정체, 중소기업의 비용 부담 증가 등 역효과가 더 크게 나타날 수 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인구구조의 급격한 변화 역시 노동시간 단축의 위험을 더 크게 만들 수 있다. 조만간 생산가능인구는 급격히 감소하고, 일부 지역과 업종에서는 인력 부족이 일상이 될 전망인데 이러한 여건에서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은 곧 노동투입 총량의 감소로 이어지고, 특히 중소기업과 자영업에서는 인건비 상승, 고용 불안, 인력난 악화가 나타날 수 있다. 동시에 대기업 정규직을 중심으로 제도가 확산될 경우, 노동시장 양극화도 심화될 것이다.
제도 정착 위해 취약 업종 위한 보완책 등 다양한 인프라 갖춰져야
당연히 정부 역시 이러한 문제를 감안해 특정 업종과 직무를 시작으로 단계적으로 신중하게 접근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처한 생산성 수준, 산업구조, 인구구조 변화 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제도를 도입하면 실질적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 제도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평가 시스템 개선, 업종별 유연성 확보, 취약 업종을 위한 보완책 등 다양한 인프라가 갖춰져야 한다. 노동시간을 줄이되 더 나은 경제성과로 이어지는 구조 전환이란 이런 조건들이 함께 갖춰질 때 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