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북한은 왜 미국과 대화하지 않을까
북한이 미국의 대화 제의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한달여 전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친서를 전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나는 김정은과 잘 지내왔다”는 점을 수차례 언급했던 트럼프 대통령이 “나는 그와 매우 잘 지내고 있다”는 현재형 표현까지 써가며 유화적 손짓을 했지만 북측은 실무접촉 자체를 아예 거부했다.
6월 대선으로 출범한 한국 정부는 북미간 대화 성사를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대북 확성기 중단 등 유화적 제스처로 지원에 나섰지만 북한은 묵묵부답이다.
지난 한달여 동안 트럼프행정부는 이란 핵시설 공습을 감행했고 전세계를 상대로 관세 전쟁에 몰입했다. 가자지구의 참혹상은 끝이 보이지 않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평화협상 중재도 아무 소득이 없다. 중동과 유럽의 혼란이 마무리되면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할 것이고 북미대화가 이뤄질 가능성이 있을 것이란 기대감도 지금은 사그라진 형국이다.
미국과 관계에서 '대화 수요' 없는 북한
앞으로 시간이 더 흘러 내년쯤이 되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마무리되면 북한이 북미대화에 응할까. 전망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대화 수요’가 거의 없기 때문이란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2023년 12월 말 김정은 위원장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9차 전원회의에서 ‘공세적 초강경 대응’을 대미정책으로 선언했고,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교전국 간의 관계’로 규정했다. 이어 2024년 10월부터는 북한군을 우크라전쟁 전선에 투입해 러시아를 돕고 있다. 북한과 러시아는 전략적 동맹관계로 밀착 수준을 계속 높이고 있다.
북한이 파병의 대가로 군사기술 분야 및 경제적 지원을 얻어내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여기에는 변화하는 세계질서에 대한 북한식의 실용주의적 판단이 깔려 있다. 미중 전략경쟁과 우-러전쟁을 계기로 미국의 유일 패권이 약해지고 다극화 조짐이 뚜렷하다. 한·미·일 대 북·중·러 블록대결 구도를 활용하면 핵무력 고도화에 속도를 내고 자체 경제발전도 이룰 호기로 삼을 수 있다. 러시아 중국의 지원을 업고 핵보유국 지위를 추구하는 데도 유리하다.
북한이 굳이 미국과의 대화에 나설 절박한 이유가 없는 조건이다. 여기에 미국의 이란 핵시설 타격은 북한으로 하여금 더더욱 대화나 협상을 멀리하게 한 촉매제가 됐을 것이란 견해도 있다. 협상 과정에서 오간 약속이 빌미가 돼 이란처럼 되레 군사공격을 당할 위험이 더 크다고 판단할 것이란 분석이다.
대화와 협상은 차치하고 접촉 자체도 틀어막은 북한의 입장은 지난 4월 9일 김여정의 담화에서 잘 드러난다. 한마디로 “시대착오적인 비핵화 집착을 버리라”는 것이다. 김여정은 자신들의 핵보유국 지위를 누구도 부정할 수 없고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다. 비핵화는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고 못박았다. 앞으로 북미간 대화는 두 핵보유국간 군축협상이 돼야 한다는 주장인데 과연 미국이 이를 수용할 수 있을까.
남북간 상호위협 감소 위한 대화 제안이 현실적
우리 정부가 바라는 북미대화를 통한 정세 반전은 기대난망인 형국이다. “북한이 쉽게 대화에 나오지 않을 것이고, 당장 응하지는 않을 것”이란 정부의 진단보다 상황이 더 안 좋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만일 남북간 접촉이 이뤄진다면 북한은 자신들이 선포한 ‘적대적 2국가론’에 대한 한국 새 정부의 입장을 요구할 공산이 크다. 2017년 북한이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이후 한국 민주진보 진영 내에서는 통일보다 평화에 무게를 두는 가운데 남북연합론과 양국론의 논쟁이 일었다. 남북연합론은 평화공존을 거쳐 남북연합으로 ‘사실상의 통일’을 이룬 뒤 통일국가로 가야한다는 견해다.
이에 비해 양국론은 평화공존 자체를 목표로 삼는다. 최근 양국론 안에서는 남북한 공존의 안전, 민족공동체의 안전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 게 실용이자 국익이란 견해가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비핵화나 통일국가 여부 등은 수단에 불과하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남북간 구체적 의제보다는 상호위협 감소를 위한 대화 제안이 현실적이라는 주장이다.
국제질서 변화로 여건이 녹록치 않은 만큼 우리 정부가 북미대화든 남북대화든 서두르기보다는 내부의 입장을 잘 조율해 정리하는 것이 우선 과제가 아닐까 싶다.
김상범 국제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