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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와 에너지, 진영논리에서 벗어나려면

2025-07-25 13:00:00 게재

"국민 21%가 극우, 연구를 한 우리도 놀랐다." 극우 연구자 최영준 교수가 얼마 전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소회다. 그는 국가주의와 반엘리트주의 등 극우 성향을 측정하는 지표 7개를 모두 충족해야 극우로 분류했다고 한다. 꽤 까다로운 요건을 적용했음에도 다섯 중 한 사람이 극우 성향이라는 결과가 나온 것은 가히 충격적이다. 최 교수는 예상을 뛰어넘는 높은 수치에 놀랄 것이 아니라 정치적 해법 모색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얘기다.

12.3 내란과 탄핵을 거치면서 극우는 한국사회의 주요 변수로 떠올랐다. 극우는 더 이상 보수의 변방세력이 아니다. 스스로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보수의 안방까지 넘보는 수준에 이르렀다. 지난 4월 서울 구로구청장 보궐선거 결과가 그 증거다. ‘외국인 불법체류자와의 전쟁’을 제1공약으로 내세운 자유통일당 후보의 득표율은 무려 32%나 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정치적 득세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들

그런데 극우의 정치적 득세보다 더 주목해야 할 문제가 있다. ‘무의식적 극우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자신도 모르게 극우적인 사고방식이나 태도를 내면화하거나 지지하게 되는 과정을 말한다. 비가시적이고 문화적으로 스며든 극우의 가치와 정서는 합리적인 이성을 마비시킨다. 폐해는 분명하다.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증오와 혐오를 부추기는 것이 일상이 된다. 편향되고 왜곡된 정보는 조직화되지 않은 개인 위주의 네트워크를 통해 은밀하게 유포된다.

극우가 벌이는 문화전쟁이 다문화주의 페미니즘 퀴어문화에 대한 공격으로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기후변화와 재생에너지도 그 대상이다. 기후변화 부정, 원자력 선호, 재생에너지에 대한 적대감은 극우의 이념적 정체성과 연결해서 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왜 극우 정당들은 기후변화를 부정하거나 그 책임이 인간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걸까. 극우의 원자력 선호와 재생에너지에 대한 적대감은 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분명한 사실은 단순한 정책 반대를 넘어서는 이념적 문화적 정치적 뿌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극우는 기후변화 대응과 에너지정책을 자신들의 정체성을 방어하는 정치적 투쟁으로 전환시킨다. 이 과정에서 동원되는 것은 반과학주의, 정체성 방어기제, 국가주의와 안보심리 등이다.

반과학주의는 극우의 세계관 및 정체성 정치와 깊숙하게 연결되어 있다. 많은 연구 결과의 공통점은 극우 성향을 가진 사람일수록 기후과학을 글로벌 엘리트 계급의 도구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세계관 안에서 과학자들과 기후전문가들은 좌파 또는 세계주의자들의 대변자로 그려진다. 그러므로 과학계의 합의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단순한 회의주의가 아니다. 기후변화 부정은 국가 주권과 문화적 자율성을 방어하는 정체성 정치의 강력한 수단일 뿐이다.

극우의 원자력 선호와 재생에너지에 대한 반감 역시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여기에도 이념적 경제적 정치적 요소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중앙집권적 원자력, 탈중앙화 재생에너지

언뜻 중립적으로 보이는 기술은 사회적 이용의 대상이 되는 순간 정치적 색깔을 갖는다. 특정 기술에 대한 호불호는 누가 통제하는가, 비용과 위험은 누가 부담하는가, 어떤 정치경제 질서를 강화하는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정파에 따라 선호하는 기술체계가 다른 것은 기술이 단순한 도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체계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극우는 전통적으로 국가주의와 안보를 중시한다. 원자력은 고도로 중앙집중적인 에너지다. 전력생산과 통제권한이 국가기관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국가주의 통치논리와 궁합이 잘 맞는다. 원자력 선호는 유사시 핵무장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안보심리와도 관련이 있다. 원전 운영과정에서 확보가능한 핵연료와 재처리 기술은 ‘우리도 마음만 먹으면 6개월 안에 핵 만들 수 있다’는 핵무장론의 재료가 된다.

재생에너지는 정반대다.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탈중앙화된 에너지다. 에너지를 직접 생산하는 시민은 정치적으로 수동적 수요자에서 능동적 참여자로 전환된다. 재생에너지가 수단이라면 목표는 에너지 민주주의다. 그래서 극우의 정체성에 정면으로 반한다. 국가가 통제하기 어려운 에너지는 극우의 제1호 경계대상이다.

기후변화와 에너지 문제를 대하는 극우의 이념적 기반을 살피는 것은 기후변화 부정론자들과 친원전론자들을 극우로 몰아세우기 위함이 아니다. 놀랍게도 한국의 극우정당들은 기후변화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래서 이렇다 할 언급이나 견해 표명 자체가 없는 상태다. 주류 보수정당들의 견해도 기후변화 회의론과는 거리가 멀다. 유럽의 극우정당들처럼 ‘탄소세는 서민증세’라며 대중의 피해의식과 박탈감을 정치적 불쏘시개로 활용하려는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에너지 문제로 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주류 보수정당과 원외 극우정치세력의 입장이 거의 같다. 원전 비중을 조금만 줄이려 해도 극도의 거부감을 보이며 오히려 원자력 발전을 대폭 확대하겠다고 한다. 재생에너지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비효율적이고 경제성이 떨어지며 운동권 마피아들의 보조금 수령 수단이라는 것이 이들의 인식이다. 이런 상황에서 에너지 전환은 진영논리에 갇혀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재생에너지 전력 공급은 글로벌 공급망에서 수출기업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는 경고도, 세계 주요 기업 리더의 97%가 재생에너지 주도의 신속한 에너지 전환을 지지한다는 최근 여론조사 결과도 현실을 바꾸기엔 역부족이다. 극우의 부상은 기후변화와 에너지 정책을 이념투쟁의 장으로 더 깊숙이 끌어들여 합리적인 비교와 판단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공론화 통해 ‘에너지 대타협’이룰 수도

수도권 수요 쏠림 완화, 전력망 혁신, 에너지 자원의 효율적인 통합을 꾀하는 이재명정부의 ‘에너지 고속도로’ 구상은 꽉 막힌 현실을 타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수십년간 굳어온 낡은 에너지체제를 바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전환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비용도 든다. 강력한 저항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제도적 기술적 과제 설정에 앞서 다음의 두가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첫번째는 정보 투명성과 디지털 플랫폼의 책임을 강화하는 것이다. 허위정보를 차단하고 의사결정의 객관적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에너지 분야에서도 점점 더 중요한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극우의 정체성 담론이 어떻게 에너지정책의 정쟁화로 변질되는지 주의 깊게 관찰하고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허위정보 및 음모론에 대항할 수 있는 사회적 회복력 키우기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에너지 정보 전달 기관인 한국에너지정보문화재단의 역할을 대폭 강화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두번째는 포용적 공론화와 사회적 대화를 거쳐 ‘에너지 대타협’을 이루는 방안이다. 1990년대 후반 독일에서 추진되었던 ‘에너지 합의’를 모델로 삼을 수 있다. 우리보다 에너지 갈등이 첨예했던 독일에서 합의가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공론화 과정이 투명하고 포용적이었기 때문이다. 환경성 안전성 경제성을 고려한 최적의 에너지 조합과 그 조건에 대해 합의점을 찾을 수 있다면 정권의 향배에 관계없이 에너지 전환을 일관성 있게 추진할 수 있다.

국민주권정부에서 국민은 정책의 수용자가 아니라 공동 설계자다. 정보의 투명성과 책임을 강화하고 정치적 리더십 기반의 대타협을 이루는 것은 그 정신에 정확히 부합하는 일이다. 극우의 일상화를 경계해야 하는 시대,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지만 절대적이지도 않다는 경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안병옥 전 환경부 차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