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관료주의와의 전쟁’ 준비돼 있나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을 인공지능(AI) 기술이 속속 등장하고 있지만 실제 적용되는 사례는 의외로 많지 않다. 미국 인구조사국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미국 기업들 가운데 AI를 유의미하게 업무에 적용하는 곳은 전체의 10%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AI 기술이 아직 완전하게 해결하지 못한 안전성과 윤리문제 탓일까.
영국 시사주간지 디 이코노미스트는 최근호 기사(Why is AI so slow to spread?)에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짚어냈다. ‘관료주의가 주범’이라는 것이다. 안전·도덕 등의 문제와 무관하게 업무 효율을 획기적으로 높일 AI 기술이 수두룩한데도 대부분 기업들이 외면하고 있고 그 까닭은 ‘밥그릇’을 위협받게 된 임직원들의 관료주의적 저항 때문이라는 진단이다.
성과를 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기업조직이 이 정도라면 ‘경쟁 무풍지대’ 정부조직의 관료주의는 어느 정도일까. 얼마 전 대한상공회의소가 ‘신산업 규제합리화 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했다는 뉴스가 이런 궁금증을 키웠다. ‘기업 연구소는 4면이 콘크리트 벽으로 막혀 있어야만 세제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등 54개 법규가 ‘신산업 성장을 가로막는 정부 규제’로 제시됐다. ‘반도체 공장을 지을 때 수평 40m 간격으로 진입 창을 설치해야 한다’와 ‘1개 사업장에 2인 이상이 미용업을 등록할 경우엔 별도 샴푸실을 갖춰야 한다’는 등의 조항도 대표적인 ‘황당 규제’로 꼽혔다.
건축기술 발달로 유연하고 창의적인 설계가 가능해졌는데도 이런 낡은 규제가 기업과 사업자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낡은 규제 여전히 기업과 사업자 발목잡아
정부가 관련 조항을 도입했을 당시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지 몰라도, 달라진 상황에 맞춰 손질하거나 폐지할 필요가 생겼는데도 고수하는 이유가 뭘까. 세상 변화에 눈감은 관료집단의 속성 탓일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 별 문제없이 잘 굴러왔는데’ 굳이 규정을 바꾸는 수고를 할 이유가 관료들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기존 규제로 인해 형성된 ‘기득권 생태계’에 관료들이 엮여있는 탓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건 관료들의 ‘고용인’인 국민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임에도 관료들의 이런 행태는 뿌리가 깊다. 오죽하면 ‘관료주의’라는 어휘가 ‘관료 사회에 만연해 있는 독선적 형식적 획일적 억압적 비민주적인 행동양식이나 사고방식’이라는 뜻으로 사전에 등재돼 있을 정도다. 한국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전세계에 공통된 현상이다.
‘시민 우선’ 자유민주주의 전통이 오래됐고 굳건한 서방 선진국들에서도 요즘 ‘관료주의와의 전쟁’이 한창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정부효율부(DOGE)’라는 조직을 신설 관료화된 공직사회 대수술에 나선 미국이 대표적이다. 조지워싱턴대학교 규제연구센터에 따르면 1960년대 초 2만쪽이었던 미국의 연방 규제법규책자가 지금은 18만쪽으로 불어나 있고, 이로 인해 미국인들이 매년 120억 시간(1인당 35시간, 2001년에는 27시간)을 규제 대응을 위한 서류작업에 써야 하는 지경이다.
유럽연합(EU) 의회는 지난 5년 동안 미국보다 두배 많은 법령을 제정, 역내 기업들에 1000여개 항목에 걸쳐 ‘지속가능성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의무화했다. 독일에서는 전체 법령집에 들어간 단어가 1960년대 중반보다 60%나 늘어났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규제 확대는 민간의 자율적·창의적인 경쟁을 가로막고 그로인한 사회적 비용을 국민들에게 떠넘긴다. 전세계적으로 제과사, 이·미용사, 페인트기술자 등 ‘면허대상’으로 규제하는 직종이 늘어나면서 사업자간 경쟁이 줄어들고 이용가격은 상승하는 사례도 줄을 잇고 있다.
미국에서는 고속도로를 건설하는데 드는 비용이 1950년대 후반 1마일(약 1.61㎞)당 860만달러(2016년 물가 기준)에서 1980년대 중반 2500만달러로 불어났고, 캘리포니아주에서는 복잡한 환경영향평가 기준으로 인해 고속철로를 짓는 게 아예 불가능해졌다고 한다.
대다수 선진국들의 경제성장률이 바닥 수준으로 떨어진 요인으로 인구 고령화와 함께 고질화된 관료주의 규제가 꼽히는 이유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규제장치들은 시장경제의 창의와 활력을 꺾는 독소로 작용한다. 대기업들처럼 대응조직을 꾸리기가 쉽지 않은 중소기업, 특히 사업을 막 시작하려는 벤처기업가들에게 치명적이다.
‘공’은 이제 친기업 표방 새 정부에게로
‘관료주의 병폐’에 가장 심각하게 중독돼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동남아시아 후발 개도국들은 물론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서도 허용된 우버 등 승차공유 사업을 봉쇄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나라다. 기존 사업자들의 조직적인 반대 때문이라지만 그들과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있는 관료집단이 더 큰 방해요인으로 꼽힌다.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은 ‘규제합리화 건의서’를 발표한 자리에서 “정부가 친기업 정부라고 강조하는데 기업이 더 성장할 수 있게 많은 규제를 없애 달라”고 했다. ‘공’은 새 정부에 넘어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