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근절, 정부-여당-기업 바빠진 발걸음
정부, 중대재해 발생 사업장에 과징금 검토 … 기업, 긴장 속 새로운 안전대책 수립 나서
이재명 대통령이 산업재해 근절을 강조하고 나서면서 정부와 기업은 물론 여당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이 대통령은 전날 국무회의에서 반복된 산업재해 사망사건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표현하며 범정부 차원의 대응을 지시했다.
31일 고용노동부와 경찰 등에 따르면 이 대통령이 직접 나서자 이들 기관은 산재 사망사고와 관련해 압수수색에 나서는 등 즉각 대응에 나섰다.
대전고용노동청과 대전경찰청은 30일 한솔제지 본사와 대전·신탄진 공장 사무실 등에 근로감독관과 경찰 등 35여명을 투입해 압수수색을 벌였다.
수사당국은 압수수색으로 확보한 증거 자료를 바탕으로 산업안전보건법 및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여부 등을 확인하고 있다. 또 노동자가 설비 투입구로 빠질 수 있는 추락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사업장의 안전조치가 적절했는지, 작업자들이 폐지 투입구가 열려 있음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경고장치가 정상 작동했는지 등 사고 발생 원인과 안전 수칙 준수 여부를 확인하는데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이번 사고는 지난 16일 오후 4시쯤 종이 제품 제조 과정의 부산물인 폐지를 처리하는 교반 기계의 투입구로 노동자가 빠지면서 발생했다. 이 노동자는 다음날인 17일 오전 2시쯤 기계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연내 산업안전감독관 300명 증원 = 또한 정부는 중대재해 발생 사업장에 과징금을 물리는 방안을 검토한다.
고용노동부는 30일 김민석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국정현안관계장관회의에서 ‘노동안전 종합대책’의 일환으로 “중대재해 발생 사업장에 과징금 제도를 포함한 다양한 실효성 제고 방안을 본격 검토하겠다”고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산업재해 사망사고와 관련해 산업안전보건법과 중대재해처벌법에는 징역형과 벌금형만 규정돼 있다. 과징금 검토는 이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에서 중대재해를 근절하는 방안 중 하나로 ‘경제적 제재 강화’가 거론된 데 따른 것이다. 이 대통령은 “안전조치를 안 하고 사고가 났을 때 과징금 같은 고액의 경제적 제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서 고용노동부는 최근 일선 고용센터 인력과 근로감독관 등 기존 조직 인력을 산업안전감독관으로 대거 전환 배치했다. 신규 인력 증원을 위해 관련 부처 협의에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자 내부 인력을 우선 배치한 것이다. 고용부는 연내 산업안전감독관을 300명 안팎 증원한다는 계획도 추진한다.
◆중처법 개정안 6건 발의 = 여당인 민주당도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이 대통령 언급 전부터 ‘중대재해처벌법’ 개정 등에 당내 공감대가 있었던 민주당은 환경노동위원회를 중심으로 논의를 빠르게 진행한다는 입장이다.
지난 28일 출범한 민주당 ‘산업재해예방 TF’는 31일 포스코이앤씨 현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국회에는 30일 기준 6건의 중대재해처벌법 개정안이 나와 있다. 재해 발생 사실을 의무적으로 공표하게 하는 등의 내용이다. 2021년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 과정에서 ‘(손해액의) 5배 이상’에서 ‘최대 5배’로 제한됐던 손해배상의 한도 규정도 재검토될 수 있다.
정청래 민주당 대표 후보는 30일 ‘대표이사의 사업장 안전, 보건조치 핵심 사항 사전 확인 및 조치 의무’ 등을 신설하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산재 다발 업종, 긴장 속 대책 마련 부심 = 기업들도 긴장 속에 대책마련에 부심한 모습이다.
특히 타깃이 된 포스코이앤씨가 속한 건설업계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업종 특성상 건설업은 추락, 붕괴, 낙하물 충돌 등 치명적 사고 위험이 상존한다. 실제로 올 1분기 산업현장에서 사고로 숨진 노동자 137명 가운데 건설업에서만 71명이 사망했다.
대다수 건설사들은 이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이 알려지자 곧 바로 현장 안전관리 강화를 위한 대책 논의를 시작했다. 롯데건설은 29일 중대 재해 근절과 무재해 달성을 위해 12월 31일까지 전국 현장에서 ‘안전 릴레이’ 캠페인을 시행하기로 했다. 캠페인은 주택, 건축, 토목, 플랜트 등 각 사업본부가 전국 현장을 권역별로 나눠 현장별로 특별안전활동을 실시한 후 다음 현장으로 ‘안전 바통’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대표적인 고위험 업종인 조선업계도 긴장하고 있다. 지난해 조선업에서는 선박 추락, 용접작업 화재, 블록에 깔리는 사고 등으로 약 20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HD현대중공업은 30일 추락·끼임·감전·질식·화재 등 9가지 핵심 위험 요소를 ‘절대 불가 사고’로 지정하고 다음 달 18일부터 중대재해의 원천 차단을 목표로 새로운 안전보건 경영 체계를 시행한다. 현장에서 절대 불가 사고 관련 안전 수칙을 위반할 경우 실제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즉시 관련 작업을 전면 중단시킬 방침이다.
HD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예측 가능한 중대재해의 ‘발생 가능성’ 자체를 현장에서 완전히 근절하는 것이 이번 제도의 핵심”이라며 “선제적으로 산업안전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려 국가적 재해 감축 목표 달성에 기여하고, 세계 최고의 안전한 조선소라는 명성을 쌓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장세풍·한남진·박준규 기자
spjang@naeil.com